“삶이 왜 이렇게까지 빨리 지나가 버리는 걸까.”
이 질문이 내 마음에 처음 스며들었던 순간을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무언가에 끊임없이 뒤쫓기는 기분으로 살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늘 쌓여 있었고, 하루는 도무지 충분하지 않았으며, 마음은 늘 다음 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멈춰 섰을 때, 나는 내 안에서 너무 오랫동안 조용히 울리고 있던 한 문장을 떠올렸다. “나는 왜 이렇게 늘 서두르고 있을까.”
‘The Ruthless Elimination of Hurry’를 처음 펼쳤을 때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주는 조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깨달았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시간 관리가 아니라 영혼의 속도라는 것을.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리듬으로 걷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향해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지를 묻는 훨씬 깊은 질문을 다루는 책이었다.
이 책은 서두름을 단순한 나쁜 습관이 아닌, 영혼을 갉아먹는 적이라고 말한다. ‘서두름은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는 문장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사랑은 느리게 흐르는 감정이다. 관계는 여유 속에서 자란다. 마음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계속해서 급하게 움직이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할 여유도, 하나님 앞에 머무를 여유도 남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런 삶을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다.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나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었고, 하루가 끝나면 마음은 이미 다음 날의 일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도 정작 중요한 사람들에게는 마음을 쓰지 못했고, 나 자신에게도 거의 관심을 주지 못했다.
이 책은 그런 나에게 아주 조용한 질문을 던졌다. “서두름 속에서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숨을 쉬듯 지나친 삶의 순간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조금 더 천천히 걷고 싶은 날조차 걸음을 재촉했던 이유,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은 다음 일을 걱정하고 있었던 이유,
기도하려고 앉았지만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 버리던 순간들.
나의 삶에는 너무 많은 ‘급함’이 있었고, 그 급함은 내 영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책은 예수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가르쳐 준다. 예수는 많은 일을 했지만 결코 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늘 사람들과 함께했고, 누군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때도 서두르지 않았다. 필요할 때는 기도하기 위해 혼자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고, 군중이 몰려들어도 마음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이 책은 예수의 삶을 통해 우리가 따라야 할 것은 ‘예수의 내용’만이 아니라 ‘예수의 속도’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나에게 새로운 통찰을 주었다. 나는 그동안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려고 했지만, 예수의 속도를 따라가려고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 깨달음 이후로 나는 내 삶의 속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음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자각했다. 일을 할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조차 내 마음은 항상 앞서가고 있었다.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면서 현재에 온전히 머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많은 순간이 희미하게 흘러 지나가 버렸고, 어떤 날들은 내가 그날을 살아냈다는 감각조차 남지 않았다.
이 책은 서두름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삶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처음엔 버겁게 들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두름은 단순히 바쁜 일정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방식’의 문제였다. 우리는 더 많이 이루어야 하고, 더 빠르게 성장해야 하며, 더 많은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책은 말한다. 영혼은 그런 수많은 외침을 견딜 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없다고. 영혼은 느리고 부드럽고 조용한 속도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고.
이 문장은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마음에 머물렀다.
내 영혼은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가느라 지쳐 있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나의 조급함에 휩쓸려 제 속도를 잃었을까.
나는 이 질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질문들을 마음에 오래 두고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내 일상에서 ‘서두름’이 얼마나 깊이 뿌리내려 있었는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서두름은 단순한 행동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이었고, 때로는 정체성의 일부처럼 굳어 있었던 것 같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 더 빨리 움직여야 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더 앞서가야 한다는 압박은 나를 계속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 압박의 이면에는 늘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뒤처질까 봐 두렵고, 실패할까 봐 두렵고,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 나는 그 두려움을 붙잡고 살면서도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못했다.
이 책은 그 두려움의 정체를 드러내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저자는 서두름이 사실상 영혼의 병이며, 그 병은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과 상실감, 정체성의 혼란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서두름 속에서 나를 증명하려는 마음이 많았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무기력한 사람이 될까 봐, 더 늦게 가면 기회가 닫혀버릴까 봐, 조금이라도 멈추면 다른 사람들이 앞서갈까 봐. 이런 마음들은 잠시라도 여유를 주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쉼을 선택하는 순간에도 마음은 여전히 가속도를 잃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여유를 갖는 것보다 더 생산적인 영적 훈련은 없다’고.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여유가 생산성을 만든다는 말은 그동안 내가 배워 온 모든 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여유를 미루고, 일과 목표를 더 크게 두는 것을 우선시해 왔다.
하지만 나는 점점 깨닫게 되었다.
여유가 없는 성취는 결국 마음을 소진시키고, 소진된 마음은 결국 아무것도 사랑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책은 예수의 삶에서 ‘속도를 줄이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는 항상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수많은 요구와 상황 속에 놓여 있었지만, 그의 마음과 행동은 결코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늘 현재의 순간에 온전히 머물렀고, 사람을 대할 때는 눈을 맞추었으며, 삶을 바라볼 때는 목적을 잃지 않았다. 예수의 삶은 서두르지 않는 삶이 아니라, 본질에 집중한 삶이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멈춰 있었던 것 같다. 본질에 집중하는 삶은 바쁜 삶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본질에 집중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불필요한 것을 비워내는 것’이었다.
책은 이를 위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 훈련을 제안한다.
고독, 침묵, 안식, 단순함 같은 영적 습관들이다.
처음에는 이 단어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약간 불편해졌다.
고독과 침묵은 현대인의 삶에서는 거의 사라진 단어에 가까웠고,
안식은 주말 중 하루를 아무런 계획 없이 보내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단순함은 갖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처럼 들렸다.
하지만 책은 이 단어들을 정확히 반대의 의미로 설명한다.
고독은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는 시간’이며,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소음을 줄여 마음의 진짜 소리를 듣는 것’이고,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하신 일을 기억하는 시간’이고,
단순함은 포기가 아니라 ‘소중한 것만을 남기는 선택’이라고 한다.
이 설명들이 내 마음을 천천히 녹였다.
나는 너무 오래 복잡하게 살았고, 복잡함을 미덕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온 시간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은 과부하가 걸린 기계처럼 종종 멈추기도 하고, 때로는 이유 없이 예민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 마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정보나 더 빠른 움직임이 아니라,
조용한 고독과 침묵, 그리고 단순한 삶의 구조라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서두름의 반대는 게으름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사랑은 서두르지 않고, 서두름은 사랑할 여유를 잃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바쁘게 뛰어다니는 삶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속도, 사랑을 건넬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삶이다.
이 깨달음은 단순히 신앙적 통찰이 아니라 삶의 실제적 변화로 이어질 씨앗이 되었다.
나는 내 일상에서 어떤 부분을 내려놓아야 하는지,
어떤 소음들을 줄여야 마음이 더 맑아질지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부분들이 조용히 재정렬되는 것을 경험했다.
서두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를 떠올리던 그 시기, 나는 문득 이전에는 전혀 문제라고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 내 마음의 공간을 끊임없이 잠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확인하던 메시지들, 생각하지 않아도 흘러들어오는 정보의 홍수, 스스로 만든 기대와 타인의 기준, 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짊어지고 있던 책임감들이 내 마음을 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목소리 없는 피로가 쌓여 가고 있었다.
이 책은 서두름을 제거하는 첫 단계로 ‘마음의 공간을 확보하라’고 말한다.
마음의 공간은 단순히 일정표에서 시간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여백을 회복하는 일에 가깝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진짜 의미의 여유가 무엇인지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다고 해서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할 일이 적다고 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유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는 것이고,
그 공간에서 비로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중요하지 않은 일들에 마음이 반응하고, 작은 자극에도 쉽게 흔들리고,
해야 할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공간이 확보되면 작은 일들에 더 이상 지치지 않게 된다.
누군가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상황에서든 내 중심을 잃지 않게 된다.
이 변화는 삶의 외적인 모습보다 내면의 구조를 더 크게 바꿔 놓았다.
책은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마음이 현재에 머물지 못할 때 사람은 쉽게 서두르게 된다.
과거의 후회 속에서 머무는 마음, 미래의 불안으로 앞서가는 마음,
그리고 현실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하는 마음은 늘 불안정한 움직임을 만든다.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멈춰 있었다.
내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는가, 아니면 늘 어딘가 앞서가거나 뒤처져 있는가.
돌아보면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다음 순간’을 향해 살았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떻게 지나가고 있는지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
마음은 늘 미래의 걱정이나 다음 할 일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하루는 실제로는 길지 않은데도 늘 지친 상태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의 영혼은 현재의 속도로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영혼은 과거에 머물지도 않고, 미래로 앞서가지도 않는다.
영혼은 언제나 지금에 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그 ‘지금’에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느 날 책을 읽고 나서 짧게 산책을 나갔던 적이 있다.
그날은 별다른 일도 없었고, 특별히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일도 없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걸었는데 걸음을 멈추는 순간,
오래 잊고 지냈던 아주 단순한 감정이 마음에 떠올랐다.
‘아, 나 지금 여기에 있구나.’
이 감정은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실한 안정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것도 이룰 필요 없는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온전히 하나님의 시선 아래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그때 깨달았다.
서두름은 단지 몸의 문제도, 일정의 문제도 아니었다.
서두름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물지 못하는 영혼의 습관’이었다.
이 습관을 바꾸기 위해 책은 작은 훈련들을 제안한다.
하루에 몇 분이라도 고요하게 앉아 있기,
식사 시간만큼은 휴대폰을 멀리 두기,
산책할 때 이어폰 없이 걷기,
말을 줄이고 듣는 시간을 늘리기,
의도적으로 속도를 낮추는 선택을 하기 같은 것들.
처음에는 이런 훈련들이 필요 이상으로 느리게만 보였다.
그러나 실천할수록 놀랄 만큼 마음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고요함을 견딜 수 없던 마음이 조금씩 고요에 익숙해졌고,
침묵이 불편했던 나에게 침묵은 오히려 회복의 시간이 되었다.
속도를 줄이는 것에서 오는 작은 불안도 있었지만
그 불안을 견디고 나서야 마음의 깊은 층에서 잔잔한 평화가 올라오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그 평화는 내가 무엇인가를 이루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더 빨리 움직인 결과로 주어진 보상이 아니라,
멈추고 나서 비로소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예수의 삶을 떠올리면 그가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왜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분은 늘 멈춰야 할 순간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머물러야 할 자리를 지켜냈으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 속도가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 삶의 리듬이 나의 영혼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삶의 속도를 바꾸기 시작한 뒤로 가장 크게 다가왔던 변화는, 내가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서두름은 언제나 무언가를 더 붙잡으라고 재촉하는 마음이었고, 나는 그 마음의 압박 아래에서 늘 무언가를 더 쌓아 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더 많은 일, 더 많은 계획, 더 많은 성취, 더 많은 관계, 더 많은 목표.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됐다. 더 많은 것을 붙잡는 것이 나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더 좁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책은 “비우는 용기”를 강조한다.
단순히 물건을 줄이는 미니멀리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불필요한 기대와 기준’을 내려놓는 일에 가깝다.
나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머물렀다.
특히 내려놓아야 할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고 스스로 만들어 온 이미지’였다.
항상 성실해야 하고,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하고,
항상 성장하고 있어야 하고,
실수하면 안 되고,
느려지면 안 되고,
멈추면 안 된다는 생각들.
이 기준들은 언뜻 보면 훌륭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기준을 지키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다 보니
정작 중요한 일들—사랑하는 일, 마음을 나누는 일,
하나님께 머무는 일—을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서두름이 만든 가장 큰 피해는 ‘사랑할 여유의 상실’이었다는 것을.
급한 마음은 사람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관계를 깊게 만드는 필수적인 시간들을 빼앗아 간다.
어떤 날은 누군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떤 날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시간과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아 그저 피곤함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런데 이 책은 그 현실을 직면한 우리의 마음에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느리다.”
사랑은 속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사랑은 머물러야 한다.
마음이 충분히 지금에 머물러야 비로소 사랑이 자란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묵직하게 멈춰 서 있었다.
내가 사랑하지 못했던 시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랑할 여유가 없었던 시간이 더 많았다는 것을
그제야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깨달음 뒤로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계획을 조금 줄이고,
해야 할 일의 목록을 과감하게 덜어내고,
조금 덜 중요한 일은 애초에 마음에 담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휴대폰을 멀리 두었고,
식사를 할 때는 천천히 씹으며 음식을 느껴보려고 했다.
기도할 때는 길게 말하려 하지 않고
잠시 침묵하며 마음이 고요해지도록 기다려 보았다.
이 작은 실천들이 삶을 바꾸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일상의 많은 순간들이 급하게 흘러가지 않아도
충분히 제자리를 찾아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날은 조용한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나를 이끌고 계신다는 감각이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예전의 나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기도 시간의 길이와 비례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일은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열어 놓는 시간에서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는 것을.
저자가 말하는 고독과 침묵의 중요성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과 정직해지는 일’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때로는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마음이 정화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 순간들은 길지 않지만 깊다.
그리고 그 깊이는 하루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나는 어느 날 저녁, 하루를 마치고 난 뒤
조용히 앉아 책의 일부 구절들을 다시 읽어본 적이 있다.
그날 따라 마음이 조금 무거웠고,
아무 이유 없이 피곤함이 가라앉지 않는 날이었다.
그런데 책의 한 문장이 다시금 마음에 박혔다.
“하루에서 서두름을 제거하면, 사랑이 들어설 공간이 생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참 이상한 안도를 느꼈다.
그날의 나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계획이나
더 많은 성취가 아니라
조용히 쉬는 공간이었다는 것을.
그 공간이 있어야 사랑도, 회복도,
하나님의 위로도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그날 나는 아주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쉬어도 괜찮아.”
그리고 그 순간,
마음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속도를 늦추기 시작한 뒤로,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이전에는 하루의 무게가 무엇으로 결정되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그 일을 얼마나 잘했는지,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얼마나 충족시켰는지 같은 것들이 하루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하루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완전히 바뀌었다. 하루를 마친 뒤 마음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는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더 쓸 수 있었는지, 하나님 앞에 잠시라도 머물렀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이 변화는 아주 느리게, 거의 인지하지 못할 속도로 찾아왔다.
그러나 그 느림이 오히려 마음의 진짜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저자는 말한다.
“영혼은 급하게 변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마치 오래 잊고 지낸 사실을 다시 떠올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영혼은 원래 느리게 움직이며, 그 느림 속에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고, 더 온전해진다.
문제는 우리가 영혼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마음을 돌보지 못한 채 너무 앞서가려고 했다.
겉으로는 분명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마음을 방치한 채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다.
영혼의 속도가 따라오지 못하는데도 앞만 보고 달렸으니
지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영혼이 뒤처진 채로 살아가는 삶에는 언제나 공허함이 있다는 것을.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충만함이 오지 않고,
아무리 많은 성취가 있어도 깊은 만족이 남지 않고,
아무리 관계가 많아도 외로움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나의 영혼이 지금의 나와 함께 걷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책은 이런 우리에게 “예수의 속도로 걸으라”고 말한다.
예수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일하는 속도가 달랐다.
사람을 대할 때 조급해하지 않았고,
기도할 때는 시간에 쫓기지 않았으며,
상황의 압박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유지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었다.
예수의 속도는 단순히 느린 속도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머무는 속도였다.
그 속도는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주었고,
삶의 모든 장면을 사랑으로 채우도록 만들었다.
나는 어느 순간 그 말이 단지 영적 교훈이 아니라
삶의 실제 지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이 급해지면 나는 종종 내가 믿는 하나님을 잊곤 했다.
하나님이 이미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
내가 도착해야 할 자리보다
이미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서두름 속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면 그 사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평안이 아주 은은하게 스며드는 것을 느끼곤 했다.
바쁘게 움직일 때는 전혀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이
조용한 침묵 속에서는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내가 잃어버렸던 것은 능률도 아니고 시간도 아니었다.
내가 잃어버렸던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의 속도’였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단지 생활의 템포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다시 나의 걸음을 맡기는 행위였다.
서두름을 내려놓는 순간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이미 내 삶을 이끌고 계셨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그 깨달음이 깊어지자
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서두름이 주던 긴장감과 경직됨이 조금씩 사라졌고,
상대의 말 속에 담긴 마음을 읽을 여유가 생겼고,
예전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작은 따뜻함도
이제는 오래 기억에 남았다.
관계가 달라졌다기보다
내가 관계 안에서 머무르는 방식이 달라졌다.
그 차이는 아주 미세했지만,
삶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놓을 만큼 분명했다.
그런 변화를 경험할 때마다
나는 이 책이 말하는 ‘서두름의 제거’가
결국은 ‘사랑의 회복’이라는 사실을 더 깊이 실감하게 되었다.
사랑은 급한 마음으로는 절대 피어나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멈춤과 기다림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절대 서두르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내 삶의 속도는 예전과는 다른 결을 띠기 시작했다.
속도를 늦추는 연습을 꾸준히 이어 가다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전해져 오는 한 가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집중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이전에는 무엇을 하든 마음이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다른 일을 생각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지금 이 일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이 따라붙었다. 기도를 드리려고 앉아도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며 마음을 분산시켰다. 그렇다 보니 어떤 일도 온전히 ‘경험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고 마음을 비워내기 시작하면서, 나는 아주 작은 순간에도 깊이 머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의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올 때조차
그 빛이 주는 따뜻함이 잠시 마음을 감싸는 느낌이 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 짧은 순간에도
입안에 머무는 향과 온도가 조금 더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 안에서도
그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더 정확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고,
말과 말 사이에 있는 미묘한 감정들까지도
이전보다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런 작은 변화들은 서두름 속에서는 느낄 수 없던 것들이었다.
삶이 주는 선물들은 대부분 느린 순간에 찾아오는데,
서두르는 사람은 그 선물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린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루 전체를 바꿀 필요는 없다. 하루 안의 단 10분이라도 천천히 걸으면 된다.”
이 말을 읽고 난 뒤 나는 정말로 10분을 따로 떼어 속도를 늦추는 시간을 만들어 보았다.
그 10분 동안 나는 해야 할 일을 떠올리지 않았고,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나와 하나님만이 존재하는 작은 공간에 머물렀다.
생각보다 그 10분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마치 꽉 막혀 있던 숨이 트이는 것처럼
내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풀리고 있었다.
그 10분은 일상의 모든 긴장을 해소해 주는 시간이라기보다
내가 누구인지 다시 기억하게 해 주는 시간에 가까웠다.
속도를 줄인다는 것의 진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지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선택이 아니라,
‘나를 다시 찾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 안에서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감각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속도를 늦추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불안이다.
나는 그 불안을 여러 번 느꼈다.
마치 잠깐만 멈추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 같고,
나를 기다리는 일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안함 말이다.
그러나 서두름의 습관보다 더 강한 것은
‘멈춰도 괜찮다’는 경험이 반복될 때 생겨나는 새로운 확신이었다.
멈춰도 무너지지 않았다.
조금 늦어져도 괜찮았다.
잠시 기다려도 문제되지 않았다.
할 일을 줄여도 삶은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놀랍게도,
속도를 줄이면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관계가 내 삶에서 중요한지,
어떤 감정들을 더 이상 붙들 필요가 없는지,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고 계시는지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은 빠른 속도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빠르게 달리는 사람은 주변 풍경을 볼 수 없듯이,
빠른 속도에서 마음은 자기 자신을 바라볼 수 없다.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리듬’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 리듬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리듬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조용히 흐르고 있는 리듬이다.
그 리듬은 급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고,
사랑을 중심에 두고 움직이며,
사람의 마음을 지치지 않게 만든다.
내가 이전에 살아온 리듬은
하나님의 리듬과는 너무 달랐다.
빠르고, 빽빽하고, 숨 쉴 틈이 없고,
사랑이 들어설 공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은 늘 건조했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리곤 했다.
속도를 줄이고 난 뒤 나는
하나님의 리듬이 내 삶에 스며드는 것을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 리듬은 내가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주었다.
예전에는 눈을 뜨면 곧바로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고,
그 생각들이 하루의 첫 감정을 결정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을 뜨는 순간
하나님께 작은 인사를 건네는 습관이 생겼다.
아무 말이 아니어도 좋고,
심지어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그저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는
아주 짧은 생각 하나면 충분했다.
그 작은 순간이 하루 전체의 결을 바꾼다는 것을
나는 여러 날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속도를 늦추는 삶을 반복하면서, 나는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진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렸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하루 내내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했다.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들—예상보다 늦어진 일정, 뜻하지 않게 생긴 실수, 누군가의 무심한 반응 같은 것들—이
내 감정을 크게 흔들어 놓곤 했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고 마음을 제자리에 두는 시간을 자주 만들기 시작하자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도 마음이 흔들리는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되었고,
불편한 감정이 올라와도 그 감정의 무게를 조금은 가볍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마음을 억지로 조절한 결과가 아니라,
마음의 ‘속도’가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였다.
저자는 서두름이 우리를 피폐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을 아주 명확하게 짚어낸다.
서두름은 마음을 얇게 만든다.
서두름은 생각을 얄팍하게 만든다.
서두름은 관계를 얇게 만든다.
서두름은 영성을 얇게 만든다.
이 문장들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나는 이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삶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면 마음은 얇아지고, 얇아진 마음은 쉽게 찢어진다.
어떤 관계도 깊이를 갖기 어렵고, 기도의 자리에서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사랑해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사랑할 힘 자체가 부족했다.
그 힘이 부족한 이유는 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속도를 늦추니 마음이 두꺼워졌다.
두꺼워진 마음은 작은 상처에 쉽게 찢어지지 않았다.
흔들려도 금방 다시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자연스럽게 사람에게 더 부드러워졌다.
예전에는 누군가의 반응을 과하게 해석했고,
상대의 말에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의미를 추측하며
혼자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말과 말 사이의 틈새를
불필요한 의미로 채우지 않게 되었다.
속도를 늦추면 상대도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불필요한 오해가 줄어들고,
관계 안에서 마음이 부딪히는 지점도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는데
내가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그 속도가 충돌을 만든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저자는 “사람을 사랑하려면 반드시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되고,
기다림은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결국 사랑을 선택하는 일과 같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예수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시 떠올려 보았다.
예수는 사람을 고치기 위해 서두르지 않았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가오면 그 사람의 이야기를
진짜 들으려고 했고,
눈을 맞추며 마음을 나누었다.
그분의 사랑은 빠르지 않았지만,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그 속도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빠른 사랑은 금방 지치지만
느린 사랑은 오래 지속된다.
느린 사랑은 깊어지고,
깊어진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마음에 떠올랐다.
내가 이전에 인간관계를 힘들어했던 이유들 가운데
상대의 문제도, 상황의 문제도 아닌
‘내 속도의 문제’였던 부분이 많았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 빠르게 기대하고, 너무 빠르게 실망하고,
너무 빠르게 오해하고, 너무 빠르게 마음을 닫곤 했다.
그 모든 빠름이 관계를 얇게 만들었다.
속도를 늦추고 나니 관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도 달라졌다.
상대를 기다릴 수 있게 되었고,
상대의 부족함을 나의 실패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대화의 침묵조차도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침묵 속에도 마음이 머물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이 힘이 점점 커지자
내가 이전에 경험하던 외로움의 결도 바뀌었다.
외로움은 사람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 자신에게 머물지 못할 때 오는 감정이었다는 사실을
서두름을 내려놓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외로움은 속도가 너무 빠를 때 커진다.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내달리고 있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었다.
그 감정을 나는 오랫동안 관계의 문제라고 착각했었지만
이제는 그 외로움이
사람이 아닌 내가 나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속도를 늦추면 나는 나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로도 돌아온다.
그 돌아옴은 고요하지만 강한 자유를 만들어 준다.
속도를 늦추어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신기하게도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마음의 결들이 하나둘 드러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마음은 조용해지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다. 그동안 쌓여 있던 작은 불안들, 말하지 못해 눌러 두었던 감정들, 이유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의 잔해 같은 것들이 고요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이 나쁘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래된 흔적으로 남아 있었던 것뿐이었다.
이전의 나는 이런 감정들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왜 그런지는 나도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감정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일은 늘 두려웠다.
아마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속도를 유지하면 감정의 문이 열리지 않고,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니까.
바쁨은 종종 마음의 숨은 방을 닫아 두는 핑계가 되어 주곤 했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면 그 방의 문이 조금씩 열린다.
그 문이 열릴 때 마음은 불편해지기도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도 희미한 해방감 같은 것이 있다.
숨겨 두었던 감정이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는 안도감,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같은 것들.
한 번은 아주 사소한 일로 마음이 흔들렸던 날이 있었다.
누군가의 말투가 조금 날카롭게 들렸고,
그 말이 하루 종일 마음 한쪽에 툭 걸려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속도를 높여 그 감정을 밀어내고
다른 일들을 억지로 집어넣으며 잊어버리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속도를 늦추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감정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그 말의 내용보다 ‘내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는 오래된 두려움’이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두려움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있었지만
늘 서두르며 살았던 나는 그 두려움을 직면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두려움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수도 있었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감정의 본질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정을 억누르면 순간은 지나가겠지만
영혼은 그 누름의 무게를 계속 기억한다.
그러나 감정을 바라보는 용기가 생기면
영혼은 그 기억을 조금씩 덜어 보낼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고독은 감정을 밀어내는 시간이 아니라, 감정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시간이다.”
이 문장을 읽고 나서 나는 고독을 더 이상 부정적인 시간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고독은 감정을 견디게 하는 시간이 아니라
감정을 이해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고독 속에서 마음의 파도가 잦아들면
그 잔잔함은 어느새 하나님께 향한 작은 기도로 이어지곤 했다.
그 기도는 길지 않았다.
때로는 말도 없었다.
그저 마음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열리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열림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속도를 늦추니 비로소 삶의 균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삶의 균형은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어느 순간에라도 ‘영혼의 숨’을 쉬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그 숨은 생각을 정리하는 숨이 아니었고,
해야 할 일을 되새기는 숨도 아니었으며,
자책이나 후회의 숨도 아니었다.
그 숨은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는 숨이었다.
이것을 기억하는 순간
해야 할 일들의 무게는 조금씩 가벼워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던 긴장도 조금씩 풀렸다.
아무도 모르게 나를 불편하게 만들던 마음의 결도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삶은 여전히 복잡했고
일정도 여전히 많았으며
모든 것이 완벽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안에 자리 잡은 깊은 평화는
작은 흔들림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저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서두름은 영혼을 분열시키지만, 고요함은 영혼을 하나로 모은다.”
이 말은 단순한 영적 조언을 넘어
삶 전체를 바라보게 하는 새로운 관점이었다.
나는 이제 알았다.
고요함은 단지 조용한 시간이 아니라
영혼이 제자리를 찾는 시간이라는 것을.
영혼이 한 곳에 모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랑할 힘을 얻는다.
그리고 이 사랑할 힘이야말로
하루를 지탱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속도를 늦추는 삶을 계속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하루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에는 하루를 ‘해야 할 일들의 목록’으로 구성된 구조처럼 생각했다. 목록이 길어지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줄어들면 잠시 안도했지만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하루를 ‘경험의 흐름’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해야 할 일의 양이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경험했는지가 하루의 분위기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 속에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더 보게 되었다.
삶은 결국 ‘경험의 질’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속도를 늦추면 경험의 질이 깊어진다.
깊어진 경험은 마음을 변하게 한다.
그리고 변한 마음이 결국 삶을 바꾼다.
그 변화는 거창한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고,
걷는 동안 바람의 결을 느끼는 횟수가 늘어났고,
식사를 할 때 음식을 씹는 속도가 자연스레 느려졌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상대가 말하는 단어뿐 아니라
그 말이 태어나는 마음까지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 모든 순간이 ‘천천히’에서 시작되었다.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예수의 속도”는 단순히 예수의 행동 양식이 아니라
예수의 내면 리듬을 의미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 실감하게 되었다.
그분이 서두르지 않았던 이유는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의 템포에 정확히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 리듬은 안정적이었고,
그 안정은 주변의 혼란을 넉넉히 품을 수 있었다.
그 품은 언제나 사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사랑은 서두름이 있는 한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이제야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왜 내 사랑이 쉽게 지치고,
왜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지고,
왜 삶이 어느 지점에서 늘 갑자기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주었는지.
그 모든 것의 근원은
내 속도가 하나님과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속도를 늦추면 하나님과의 거리도 자연스럽게 좁아진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루의 어느 순간에서든 속도를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
하나님과 연결되는 문이 열린다.
이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마음의 조용한 ‘멈춤’이었다.
나는 어느 날 아침,
기도를 드리기 전에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다가
불쑥 이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내가 하나님께 다가가려고 애쓸 때보다
그냥 잠시 멈추어 숨을 쉬는 그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셨다는 사실을.
하나님은 분주한 마음의 틈새로는 잘 들어오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마음의 소음 속에서는 그분의 음성이 묻혀 버린다.
그러나 마음이 고요해지는 단 몇 초의 틈에서도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스며드신다.
그 순간 깨달았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빠르게 가도 방향이 맞으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서두름은 방향을 흐트러뜨린다.
조급한 마음은 시선을 앞에 두고,
두려움은 시선을 결과에 두고,
불안은 시선을 가능성에만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지금’으로 돌아온다.
‘지금’에 하나님은 언제나 계신다.
미래로 도망가는 마음에는 하나님과 만나기 어렵지만
지금 이 순간의 고요함 속에서는
그분을 만나는 일이 놀라울 만큼 자연스럽다.
나는 이 경험을 반복하며,
‘느림’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세우는 형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이 관계가 회복될 때
삶은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갖게 된다.
여전히 문제들은 존재하지만
문제가 주는 압박이 과거처럼 숨을 죄어오지 않는다.
여전히 일정은 많지만
그 일정이 마음을 갉아먹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전히 각자의 속도로 움직이지만
그들의 속도가 나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속도를 늦추면서 생긴 변화는
겉으로는 아주 작은 흔들림에 불과했을지 몰라도
내면에서는 새롭게 짜여지는 삶의 구조와 같았다.
그 구조의 중심에는 더 이상 성취나 인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친밀함이 생기자
나는 더 이상 하루를 완벽하게 살려고 애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 하루의 어느 지점에서라도
하나님과 연결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약간의 실수나 지연도 더 이상 큰 문제가 아니게 되었고,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부담도 줄어들었다.
속도를 늦추자,
비로소 하나님이 이미 내 삶을 붙들고 계셨다는 사실이
조용히, 그러나 견고하게 마음에 새겨졌다.
속도를 늦추는 삶을 계속 품어 가다 보니, 나는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변화 하나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깊이’라는 것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이 깊어진다는 말은 어쩌면 막연하게 들리지만, 실제 삶의 장면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예전에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대부분 순간적인 압박이나 외부의 기대로 인해 빠르게 선택하곤 했다. 선택이 빨랐다는 것은 항상 좋지 않았다. 후회도 많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자주 있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면서, 나는 선택을 둘러싼 감정들과 생각들이 충분히 머물 공간을 마음 안에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공간에서 결정을 바라보면, 이상하게도 선택의 방향이 분명하게 떠올랐다.
결정의 속도가 느려진 것이 아니라
결정의 ‘기준’이 바뀐 것이었다.
이전에는 사람들의 반응이나 결과의 유불리를 먼저 생각했다면
지금은 내 영혼이 어디로 더 평안을 느끼는지를 먼저 살폈다.
그 평안이 온 방향이 결국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향이었다.
나는 이 변화를 경험하며,
“하루의 속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저자의 말이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깊은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속도를 늦추는 삶은 나를 더 나답게 만들었다.
나의 욕심과 비교, 두려움에 자꾸만 기대어 살아가던 삶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떨어져 나온 자리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살포시 머무를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이 생기자
나는 내 삶에서 작고 소중한 것들을 더 자주 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사소한 친절, 말없이 곁을 내주는 사람의 표정,
날씨가 좋아 마음이 미묘하게 가벼워지는 순간,
오래된 상처가 갑자기 조금 덜 아프게 느껴지는 날 같은 것들.
이 작은 순간들은 종종 삶의 무게에 덮여 보이지 않지만
사실은 마음을 살리는 아주 중요한 요소들이었다.
바쁨 속에서는 이런 순간이 그냥 지나가 버리고,
조급함 속에서는 이 순간들을 느낄 여유조차 없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면,
이 작은 순간들이 마음 안에서 탁 트인 빛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습관처럼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가
문득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없는 방 안에서 잠시 그대로 머물렀다.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스며드는 고요함은 생각보다 진했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알았다.
“나는 사실 이런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았구나.”
서두름은 우리에게서 고요를 빼앗아간다.
고요가 사라지면 마음은 자꾸만 건조해지고
건조해진 마음은 쉽게 찢어지고
찢어진 마음은 결국 사랑을 흘려보낼 힘을 잃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일을 더 잘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고,
무언가를 더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속도를 더 높인다.
그러나 성취가 채워주는 만족은 잠시뿐이고
사랑이 채워주는 평안은 오래간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고요 속에서만 충분히 자란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결국
‘고요를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 고요는 나를 피하게 만드는 침묵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가장 깊이 만나게 해 주는 침묵이었다.
저자는 반복해서 말한다.
“고요함은 영혼의 산소다.”
이 말은 책을 덮은 뒤에도 오래 남았다.
고요함이 없으면 마음은 숨을 쉴 수 없다.
잠깐이라도 멈춰 숨을 고르는 시간은
마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산소였다.
이 고요함을 경험하며 나는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감각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이전에는 기도를 한다고 해도
기도가 일처럼 느껴지거나
해야 하는 의무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고
마음에 고요가 찾아오면
기도는 갑자기 자연스러운 호흡처럼 흘러나왔다.
말이 없어도
그저 마음이 하나님께 기울어져 있기만 해도
충분했다.
그 상태가 기도였고
그 고요가 곧 하나님의 품이었다.
그리고 그 품 안에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삶의 무게를 다시 감당할 힘을 얻었다.
문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마음의 자리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조급함 대신 기다림이 자리 잡았고
불안 대신 신뢰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느렸지만,
그 느림 속에서만 자랄 수 있는 변화였다.
속도를 늦추는 삶이 어느 정도 몸에 배어 갈 때쯤, 나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 온 것들’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전의 나는 일의 성과, 사람들의 평가, 일정 안에 얼마나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지 같은 요소들에 마음의 비중을 두고 있었지만, 속도를 늦추면서 마음이 점점 그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일을 해야 했고, 여전히 책임을 다해야 했지만
더 이상 그것들이 나의 가치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게 되었다.
그 기준이 조용히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속도가 빨라지면 나 자신을 잃고, 속도를 늦추면 하나님 안에서 다시 나를 찾는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이해가 조금 막연했지만,
삶 속에서 이 진리를 경험하면서 나는 그 말의 의미가 얼마나 정확한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이전에 그렇게도 조급했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불안해지고,
누군가의 말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던 이유는
내가 ‘나’를 붙잡고 있지 못해서였다.
그 자리를 성취나 인정이 대신 차지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언제나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속도를 늦추는 동안
나는 그동안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던 불필요한 의무감들,
누군가 보여주기 위해 움직였던 동기들,
스스로 만든 완벽함의 기준들을
하나씩 내려놓게 되었다.
그럼에도 신기하게도
내가 하는 일은 예전보다 더 안정적으로 흘러갔다.
불필요한 성과의 압박을 덜 느끼면서도
오히려 집중력이 높아졌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러워졌으며
작은 실수에 대한 자책도 조금씩 사라졌다.
마음이 단단해지니
삶 전체의 균형이 자연스레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 비로소 알았다.
내가 잃어버렸던 평안은
능력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놓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속도를 늦추자
마음이 ‘지금 여기’로 다시 돌아왔고
마음이 돌아오자
하나님의 음성도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음성은 큰 소리도, 명확한 지시도 아니었다.
그저 마음이 조용히 이끄는 방향.
서두름 속에서는 결코 들리지 않던 그 부드러운 방향감각이
마음이 차분해진 자리로 스며들었다.
어느 날 저녁, 아주 평범한 날이었는데
따뜻한 물로 손을 씻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지금 너무 빠르게만 살고 싶어 했구나.”
그 생각이 들자,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묵혀 두었던 감정 하나가 올라왔다.
그것은 미묘한 슬픔 같은 것이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느껴지는 감정.
사실 나는 오랫동안 마음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무너졌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바빴던 날들,
상처를 외면한 채 앞만 보던 시간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도
마음이 너무 지쳐서 손을 뻗을 힘조차 없었던 순간들.
그 모든 순간이 서두름이라는 이름으로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그날 나는 오랜만에
하나님 앞에서 아주 작은 고백을 했다.
말을 많이 하지도 못했고,
오히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도 잘 몰랐지만
그저 이렇게 속삭였다.
“하나님, 제가 너무 빨랐죠…”
그 말 한마디에 마음 어딘가가 서서히 풀리는 느낌이 있었다.
마치 오래 굳어 있던 매듭이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풀려 나가는 듯한 감각.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속도를 늦추는 일을 ‘선택’이라기보다
‘삶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느리게 사는 것이 미덕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느리게 살아야만
내가 사랑하고 싶은 방식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서두름은 사랑을 삼킨다.”
이 말은 철저히 맞았다.
서두름은 사랑을 잠식하고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고
삶의 깊이를 저당 잡힌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어
그분과의 친밀함을 흐려 버린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면
사랑이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귀하게 여길 힘이 생기고
내 마음의 부드러운 부분이 회복되며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문이 조금 더 넓게 열린다.
나는 이런 변화를 경험하며,
‘서두름의 제거’라는 말이
단순한 습관 교정이나 라이프스타일 변화가 아니라
영혼의 회복을 위한 근본적인 조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속도를 늦추니
사랑이 돌아오고
평안이 돌아오고
하나님이 다시 보인다.
속도를 늦추는 과정 속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겉이 아니라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었다.
이전의 나는 늘 스스로에게 엄격했고, 늘 평가적이었다.
“이 정도는 해야 한다”, “왜 이것밖에 못 했지?”, “좀 더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같은 문장들이
하루의 거의 모든 순간에 배경음처럼 흘러가곤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도 정작 나는 그게 ‘당연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빠른 사람을 선호하고,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유능하다고 말했고,
나도 모르게 그 기준을 내 마음의 중심에 가져다 놓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고 마음의 고요함을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하자
그동안 내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를 지치게 만든 것은 바쁨이 아니라,
바쁨을 핑계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마음의 방식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서두름은 우리를 가장 먼저 우리 자신으로부터 떼어 놓는다.”
이 말은 내 마음의 오랜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준 말 같았다.
나는 오랫동안 나 스스로와의 관계에서 서두르고 있었다.
감정을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고,
내 마음을 다독여 줄 시간도 없었고,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묻는 순간조차 거의 없었다.
그저 계속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자
마음이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그동안 억눌려 있었던 만큼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조금 쉬어도 돼.”
“지금 힘든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너무 빨리 가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런 목소리들이 하루에 한 번씩, 혹은 아주 짧은 순간마다
내 마음에 올라왔다.
나는 그때서야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정한 말을 건네본 적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마치 거울 속의 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속도를 늦추는 일은
스스로에게 다시 친절해지는 과정이었다.
그 친절은 단순한 자기 위로가 아니라
영혼의 회복을 위한 토대였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사람은
결국 타인에게도 부드러움을 잃어간다.
사랑을 나누는 힘 자체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속도를 늦추니
스스로를 비난하던 마음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오래전부터 들려주고 계셨던 목소리가
조용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고요하게 전하고 있었다.
그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자
나는 나 자신을 향한 시선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하루를 완벽하게 보내지 않아도 괜찮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내지 못해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다.
대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마음을 지탱해 주었다.
이 감각이 깊어지자
삶에서 ‘속도의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뀌었다.
예전에는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가 가장 중요한 원리였지만
지금의 나는
더 고요하게, 더 깊게, 더 사랑 안에서가
삶을 움직이는 중심이 되었다.
이 원리는 일터에서도, 관계에서도,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예전의 기도는 어떤 면에서는 ‘해야 할 일’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도는
그저 마음이 하나님께 기대어 쉬는 시간에 가까웠다.
말을 하지 않아도,
기도의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마음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이 이미 기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어쩌면
우리가 조용히 앉아 있는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 마음은 고요와 연결되고
고요는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은 나에게 큰 자유가 되었다.
기도는 더 이상 나의 성실함이나 경건함을 증명하는 시간이 아니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조용한 자리였다.
그리고 그 친밀함 속에서만
나는 진짜 평안을 맛볼 수 있었다.
속도를 늦추면
평안이 다시 찾아오고
평안이 찾아오면
사랑이 회복되고
사랑이 회복되면
삶은 다시 깊어진다.
나는 이 순환을 경험하며 알게 되었다.
서두름을 제거하는 것은 결국
‘영혼이 살기 위한 조건’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을.
영혼은 조용함 속에서 숨을 쉬고
고요함 속에서 강해지며
하나님과의 친밀함 속에서 비로소 생기를 얻는다.
그래서 속도를 늦추는 일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되찾는 가장 깊은 선택이었다.
속도를 늦추는 시간이 일상 깊숙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나는 이전에는 몰랐던 또 다른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분별력’이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예전에는 어떤 일이 닥치면 즉각 반응했고, 감정이 조금만 흔들려도 바로 결론을 내리려 했으며, 관계 안에서 갈등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컸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자, 반응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 가라앉는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이 불과 몇 초에 불과하더라도,
그 몇 초가 순간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놓곤 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분별력은 속도와 반비례한다.”
이 문장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빠를수록 실수가 많아지고,
빠를수록 감정이 흐릿해지고,
빠를수록 불안이 나를 끌고 다녔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속도가 느려지면 감정의 결이 더 잘 보인다.
감정이 단지 표면에서 튀어나오는 자극인지,
아니면 오래된 상처가 건드려져서 생기는 반응인지,
그 둘의 차이가 천천히 걸을 때 비로소 구별된다.
느린 마음은 깊이를 갖는다.
깊이는 상황을 더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사람의 말과 행동이 때로는 그 사람의 상처나 두려움에서 나올 때가 많다는 것을
속도를 늦추면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관계 안에서의 오해가 크게 줄어들었다.
예전의 나는 상대가 조금만 무례해 보여도
그 무례함을 곧바로 ‘의도’라고 생각하곤 했다.
“나를 무시하나?”,
“내가 만만해 보이나?”,
“왜 저 사람은 저럴까?” 같은 해석들이
순식간에 마음속에서 생성되곤 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고 나니
상대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누군가 날카롭게 말하면,
그 사람이 그날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었고,
누군가 예민하게 반응하면
그 사람의 마음 어디쯤이 지쳐 있을까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해석이 달라지자
관계에서 느껴지는 피로감도 놀라울 만큼 줄어들었다.
속도를 늦추면
사람을 해석하는 시선이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워진 시선은
사람을 판단 대신 이해로 이끈다.
이 변화는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내가 그토록 관계에 지치고 힘들었던 이유 중 상당수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내 속도 때문’이었다는 사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차분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작은 말에도 쉽게 상처받고
사소한 감정에도 크게 흔들렸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힘은 결국 속도의 함수구나.”
사람을 사랑하려면
그 사람의 속도에도 걸어가 줄 여유가 필요했고,
그 여유는 빠르게 사는 삶에서는 절대 생기지 않았다.
느림 안에서 사랑이 자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책에서 저자는 ‘삶의 템포’를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 템포는 단지 여유로운 생활 리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사랑을 품을 수 있는 속도였다.
영혼은 빠르게 살면 사랑을 흘려보낼 힘이 없지만
천천히 살아가면
사랑이 자리를 차지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달은 뒤로
사람을 대하는 방식뿐 아니라
사람을 바라보는 감정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경계심과 피로감이 먼저였지만
지금은 이해와 따뜻함이 먼저 올라온다.
사람의 부족함을 봐도
그 부족함이 더 이상 나를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서두름에서 벗어나자
타인의 부족함을 나의 부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속도를 늦추니
내 마음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나를 지키기 위해 움직였지만
지금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움직인다.
예전에는 관계가 나를 흔들었지만
지금은 마음이 관계를 부드럽게 감싸는 순간이 많아졌다.
삶의 중심이 바뀌면
관계의 느낌도 바뀌고
일상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고
하루의 결 전체가 더 부드러워진다.
이 변화는 느렸지만 분명했다.
나는 이 느린 변화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시작되어
점점 바깥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매일 경험하고 있다.
마치 영혼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과정처럼.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가 있다.
하나님.
하나님 안에서 속도를 늦추는 삶은
결국 하나님과 같이 걷는 삶이기 때문이다.
속도를 늦추는 삶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 갈수록, 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예전의 나는 시간을 철저히 생산성 중심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가 시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면서부터
시간이 더 이상 ‘소비해야 할 자원’이 아니라
‘머물러야 할 선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아주 미세한 감각에서 출발했지만,
삶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놓을 만큼 큰 흐름이었다.
나는 어느 날 아침,
잠깐 창문을 열었는데 차갑지만 맑은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 공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
몸이 아주 자연스럽게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 하나가 그날 하루를 끌고 갔다.
작은 순간이었지만
그 작은 순간이 마음에 남긴 여운은 오래 갔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토록 짧은 순간에도 삶은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빠른 삶은 이런 순간을 지나쳐 버린다.
느린 삶만이 이런 순간을 받아들일 수 있다.
저자는 ‘시간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시간에게 맞춰 사는 삶’을 강조한다.
이 말은 단순히 구분의 차원이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방식 전체를 새롭게 조정하는 개념이었다.
빠르게 살면 시간은 늘 부족하다.
하루가 짧게 느껴지고,
몇 시간을 살아도 성취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미 지나간 시간에 대한 후회와
앞에 놓인 시간에 대한 압박이 동시에 밀려온다.
그렇게 마음은 늘 당겨지고 밀려다니며 지쳐 버린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면
시간이 갑자기 넉넉해진다.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마음이 시간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 흐름 속에서
나는 시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걷는 법을 배웠다.
이러한 경험은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예전처럼 다음 할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고,
상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응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 자체가
관계의 깊이를 결정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속도를 늦추면
상대의 말 사이사이에 있는 감정의 결이 들린다.
그 결은 말의 내용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사람의 깊음은 늘 말 사이에 숨어 있는 법이다.
어떤 날에는
평소라면 건너뛰었을 아주 작은 대화 하나가
하루 전체의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서두르는 삶에서는 이런 대화가 사치처럼 느껴졌지만
천천히 걷는 삶에서는
이런 대화가 영혼을 살리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들이 쌓이면서
나는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속도를 늦추면
사람과 하나님 모두에게
머물 공간이 생긴다는 것.
하나님은 늘 우리를 부르시지만
말씀하시는 방식은
급한 소리도, 강한 압박도 아니었다.
그분의 음성은 언제나 고요했다.
그래서 서두르는 사람은
그 음성을 듣기 어렵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면
그분의 음성이 마음에 은은하게 스며든다.
그 음성은 때로는 생각 한 조각처럼 다가오고,
어떤 날에는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는 평안으로 찾아오고,
어떤 날에는 아무 말 없이
단지 ‘함께 있음’으로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 감각을 경험하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속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바쁘면, 너무 빠르면
하나님이 나를 만지고 계시는 순간조차
스쳐 지나가 버린다.
이 깨달음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의 성공 여부는
얼마나 바쁘게 살았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고요하게 하나님과 동행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하루의 피로는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조급했는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속도를 늦추면
하루는 더 이상 ‘전쟁터’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정원’처럼 느껴진다.
물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고
여전히 책임이 있으며
여전히 때로는 혼란스러운 상황이 찾아오며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고요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의 숨결 자체가 부드러워진다.
이 부드러움이 생기면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러워지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도 부드러워진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은
삶 전체를 다시 하나로 묶어 주는 중심이 된다.
나는 속도를 늦추면서
내 삶에서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바로 ‘여유로움이 있는 마음의 얼굴’이다.
웃음이 억지로 나오지 않고,
대화가 의무가 되지 않고,
하루가 버텨야 할 시간이 아니라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 되어 간다.
마음의 가장 은밀한 자리 – ‘하나님 앞에서 쉬는 법’ 을 배워가는 여정
속도를 늦추며 살아가다 보니,
나는 어느 순간부터 ‘쉼’이라는 단어의 진짜 의미를 다시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쉼은 예전의 나에게 그저 일을 잠시 멈추고, 잠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의미했다.
그러나 속도를 줄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진짜 쉼은 단순한 중단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마음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는 과정이라는 것을.
저자는 “쉼 없는 영혼은 결국 사랑할 힘도 잃는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조금 아픈 듯한 울림을 느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오랫동안 쉬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고,
그 결과 사랑할 힘도 자주 고갈되곤 했다.
사람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정작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사랑이 억지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고,
관계가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부족이 아니라
‘쉼의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쳐 있었는지를 비로소 느끼기 시작했다.
그 지침은 달리기 때문에 생긴 피로가 아니라
늘 마음이 긴장되어 있던 데서 생긴 ‘심리적 탈진’에 가까웠다.
몸은 쉬었지만,
마음은 단 한순간도 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속도가 내려가고,
마음이 고요함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놀랍게도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피로가
지금은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이 보였다.
나는 늘 피곤해야만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늘 바빠야만 중요한 사람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기준이었다.
성경 속 하나님은
우리를 바쁘게 움직이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쉬게 하시는 분이었다.
세상을 창조하신 뒤
하나님이 먼저 하신 일도 ‘안식’이었다.
예수도 사역 중에 자주 물러가 고요히 기도하셨고,
혼자 있는 자리를 즐겨 찾으셨다.
그분의 삶은 쉼과 사역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이어진 한 흐름이었다.
나는 그 흐름을 이제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쉼은 사역을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일부였다.
쉼 없이 사랑할 수 없고
쉼 없이 건강할 수 없고
쉼 없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없었다.
속도를 늦추면
영혼은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 숨이 깊어질 때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마음의 가장 보드라운 부분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위로와는 달랐다.
성취에서 오는 만족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인정에서 오는 확신도 아니었다.
그 평안은 설명하기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마음을 살리는 부드러운 힘이었다.
그 힘이 내 안에 자리 잡기 시작하자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이렇게 바쁘게 살아왔을까?”
이 질문은 이전의 나에게는 너무 무겁고 두려운 질문이었다.
만약 그 대답이 나를 실망하게 한다면
어쩌면 지금까지의 노력 전체가 헛수고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도가 늦춰진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질문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나는 더 사랑받고 싶었고,
더 인정받고 싶었고,
더 가치 있어 보이고 싶었다.
그 모든 바쁨의 바닥에는
사랑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지보다
내가 누구인지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가치는
성취나 속도, 능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이 진리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내 삶의 속도는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더 빨리 달릴 이유가 줄어들었고,
시작하기 전에 먼저 숨을 고르게 되었고,
사람을 대할 때도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그 여유는 나를 더 인간답게 만들었고
더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셨다.
속도를 늦추는 삶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기 때문이다.
속도를 늦추며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조금씩 새로운 방식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이 때로 ‘준비된 마음’의 상태에서만 가능한 것처럼 느껴졌고,
내가 더 경건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기도는 늘 ‘해야 하는 시간’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해야 할 때는 마음이 복잡하고 지쳐 있어서
말 한마디 꺼내기도 어려운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속도가 내려가고 삶의 불필요한 급함들이 사라지기 시작하자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만남은 준비된 경건함보다
조용히 숨 쉬고 있는 마음에 더 가까웠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었고,
형식을 갖추지 않아도 되었고,
심지어 명확한 기도 제목이 없어도 괜찮았다.
단지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만 해도
그 순간 전체가 기도가 되었다.
저자는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회복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는
당연한 말처럼 보였지만,
속도를 늦춘 지금의 나는 이 문장의 깊이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친밀함은 빠른 속도에서는 생겨날 수 없다.
친밀함은 고요에서 태어나고,
고요는 천천히 걸을 때만 찾아온다.
속도를 늦춘 삶에서의 기도는
마치 마음이 하나님께 기대듯 놓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보면 말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히려 말 없이 숨만 깊어져도
그 깊어진 숨이 하나님께 닿는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어느 날 밤, 잠들기 전 불을 끄고 누워 있었는데
문득 마음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나님은 지금 나를 보고 계시겠지.”
그 생각은 어떤 종교적 확신이나 열정이 아니라
아주 부드러운 위로처럼 다가왔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고백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고백은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아마 이런 느낌일 것이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어요. 그리고 하나님도 여기 계시죠.”
바로 그때 깨달음이 스며들었다.
이 친밀함은 빠르게 사는 삶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
급한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척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여유를 박탈한다.
반대로 천천히 걷는 마음은
하나님이 이미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속도를 늦추자
하나님의 사랑이 전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 사랑은 나를 재촉하지 않았고,
나를 평가하지 않았고,
내가 더 잘해야 한다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랑은
“괜찮아, 조금 천천히 와도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 음성은 삶의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다.
해야 할 일의 압박이 줄었고,
사람에 대한 마음의 여유가 늘었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빨리 가야만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미 충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인정할 수 있었다.
이 인식이 생기자
서두름 속에서 자라나곤 했던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가 내가 누구인지 결정하지 않았고,
속도가 나의 가치를 말해 주지 않았으며,
일의 성과가 나를 평가하는 기준도 아니었다.
하나님의 시선 아래에서
나는 ‘결과로 존재하는 사람’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회복은 아주 깊은 자유로 이어졌다.
그 자유가 생기니
삶이 조금씩 가벼워졌고,
마음이 조금씩 단단해졌으며,
생각의 결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 자유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이제 확실히 안다.
그것은 속도를 늦춘 자리에서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온 것이다.
서두름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지만
느림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만든다.
그리고 이 느림이 쌓이면
삶 전체가 하나님과 함께 걷는 리듬으로 재정렬된다.
나는 지금 그 리듬 속에서
조금씩, 아주 천천히
하루하루의 평화를 다시 배우고 있다.
속도를 늦추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가는 경험은
단순한 감정적 안정이나 위로의 차원을 넘어
삶의 근본적 구조를 다시 짜는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밖에서 보면 아주 미세해 보이지만
안에서는 생각보다 큰 재편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님 나라의 리듬과 맞닿아 있을까?”
이전의 나는 이 질문을 거의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너무 ‘물질적 시간표’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정, 마감, 효율, 속도, 목표.
이 단어들이 내 삶의 중심에 있었다.
하나님을 찾는 마음도 이 구조 안에 끼워 넣으려 했고
기도마저 효율과 성취의 언어로 이해하려는 날들이 많았다.
기도는 이루어질 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과의 동행은 “내가 얼마나 잘 하고 있는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속도를 늦추며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나자
하나님 나라의 리듬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관계의 속도’로 움직이셨다.
사람을 고치실 때도,
제자들과 걸으실 때도,
홀로 기도하실 때도,
예수는 한 번도 서두르지 않으셨다.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무엇과 함께, 누구와 함께 걷느냐였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삶에서는 거의 적용하지 못하고 살았다.
늘 앞을 향해 달렸고
내가 설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불안해졌고
때로는 하나님마저 나를 기다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속도를 늦춘 지금의 나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다.
하나님의 걸음은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천천히,
그리고 훨씬 부드럽게 흘러간다.
그 천천함은
게으름이나 소극성이 아니라
사랑이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속도였다.
사람의 마음도
예수님이 걸으신 바로 그 속도에서만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예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오는 그 순간에도
홀로 산으로 물러가 기도하셨다는 구절을 다시 읽게 되었다.
그 구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나는 생각했다.
“지금의 나였다면…
아마 그 상황에서 기도의 시간을 포기했을 거야.”
사람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으니
하나님과의 시간을 미뤄도 괜찮다고,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달랐다.
그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의 요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 연결이 유지될 때만
사람들을 사랑할 힘도 생기고
사명을 감당할 지혜도 생기고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는 정확히 알고 계셨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린 이유는
하나님을 찾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바빠서,
너무 빠르게 살아서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감각을
느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냐하면 그동안 나는
하나님과의 거리감을 ‘내 영성의 문제’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영성이 아니라
삶의 속도였다.
속도를 늦추자
하나님과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그 사실은 나에게 묵직한 위로를 주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대단한 결단이 아니라
단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깨달음을 품고 살아가자
삶의 방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지금은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는가”가
하루의 중심 질문이 되었다.
이 질문 하나가
마음의 무게를 부드럽게 낮춰 주었다.
누군가 나를 어떻게 보든
내 계획이 조금 늦어지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든
그 모든 순간이 이전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하나님과 같은 속도로 걷고 있기 때문이다.
속도를 늦추며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 조금씩 내 일상에 자리 잡아 갈수록,
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더 자주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이전보다 훨씬 더 온전하게 현재에 머물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예전의 나는 늘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갔다.
해야 할 일들, 준비해야 할 것들,
혹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가능성들 때문에
마음이 늘 앞서 있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정작 ‘지금 여기’를 깊이 경험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니
현재가 선명해졌다.
아침의 공기,
따뜻한 햇빛,
책 한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는 손끝의 감각,
누군가와 나누는 짧은 미소조차도
더 오래 머물렀고,
더 깊게 느껴졌고,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하나님은 늘 이 ‘지금’이라는 순간에 계시는데
내가 너무 빠르게 달리느라
하나님이 계신 자리를 자꾸 지나쳐 버리고 있었다는 것을.
저자는 ‘현재성(presence)’에 대해 자주 말한다.
그가 말하는 현재성은 단순히 집중력이나 마음챙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그분의 임재 안에 머무는 영적 감각을 말한다.
속도를 늦추면 이 감각이 깨어난다.
그러면 아주 작은 순간에도
하나님의 흔적이 보인다.
나는 어느 날,
평소처럼 커피를 내리고 있었는데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장면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마음이 조용히 깨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평안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 순간은 하나님이
“여기 있다”고 속삭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이전의 나는
하나님이 나를 만지시는 순간을
기도 시간이나 예배 시간에만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속도가 늦춰진 지금의 나는
하나님이 일상 곳곳에서
나를 조용히 만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있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와 다시 연결된다는 뜻이었다.
하나님은 감정의 폭풍 속에서도
일의 압박 속에서도
복잡한 고민 속에서도
늘 내 옆에 계셨지만
내가 너무 빠르게 움직여서
그분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일 뿐이다.
그 깨달음은 내 삶에서
매우 중요한 결정을 새롭게 세웠다.
바로 “하나님이 계신 자리에서 살아가자”는 결심이었다.
하나님은 미래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계신 분이다.
그래서 나는 미래의 불안 때문에
마음을 앞세우는 버릇을 조금씩 내려놓았다.
두려움을 줄이려고 미래를 통제하려 했던 습관도
조금씩 힘을 잃어 갔다.
미래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걸으며 열어 가시는 길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마음의 중심으로 옮겨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내가 가진 많은 두려움들의 형태도 바꿔 놓았다.
예전의 불안은 늘
“이 일이 잘못되면 어쩌지?”
“내가 여기서 실패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같은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춘 지금은
이 질문들이 거의 힘을 잃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신 공간에서는
두려움이 더 이상 나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 계시다는 확신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을 자연스럽게 누그러뜨린다.
나는 하나님 없이 미래를 통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늘 불안했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현재를 살아가면
미래는 더 이상 내가 쥐어짜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열어 가는 여정이 된다.
이 변화는 정말로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 삶을 바꾸고 있다.
마음의 힘은
미래를 예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머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속도를 늦추자
하루가 더 깊어지고
관계는 더 부드러워지고
기도는 더 자연스러워지고
하나님의 임재는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변화를 통해
한 가지 진리를 조금씩 확신하게 되었다.
“영혼은 빠른 삶에서는 절대 자라지 않는다.”
영혼은 고요함 속에서만 자란다.
고요함은 느린 속도에서만 찾아온다.
그래서 느림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영혼의 생존 방식이었다.
속도를 늦추는 삶 속에서 또 하나 선명해진 것은
‘내가 무엇을 잃어왔는가’와 동시에 ‘내가 무엇을 되찾아가고 있는가’라는 사실이었다.
빠르게 살던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많은 것들을 흘려보냈다.
사소한 기쁨들, 소중한 관계의 미세한 변화들,
하나님이 주셨던 작은 위로의 순간들,
그리고 무엇보다 내 영혼이 쉬어 갈 자리.
그 모든 것들은 바쁘다고, 급하다고,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의 속도 때문에
내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데 속도를 늦추고 나니
그동안 흘려보냈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했고
그 소중함이 내 영혼을 살리는 요소들이었다는 사실이
하나둘씩 알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관계 속에서 이 결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예전에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켠으로 다른 일을 생각하거나
해야 할 일정이나 준비해야 할 다음 순간에 마음이 묶여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듣지 못했고
관계가 얇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고 마음이 현재에 머물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하는 말뿐 아니라
그 말의 뒤에 있는 숨결과 감정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상대의 표정, 말하는 속도, 잠깐의 망설임조차도
그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창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관계의 깊이는
말의 양이나 만남의 빈도가 아니라
‘내가 그 순간에 온전히 머물러 있었는가’에 달려 있었다.
속도를 늦춘 지금의 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이전보다 훨씬 오래 머무른다.
머무른다는 말은
상대의 말을 끊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하지 않고,
상대의 감정이 내 마음에 닿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다림 속에서
상대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고
나 역시 좀 더 부드러운 모습으로 그 사람을 받아들이게 된다.
서두름이 있던 시절에는 이런 기다림이 불가능했다.
기다림은 여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유는 느림에서만 나온다.
이제 나는 알게 되었다.
느림은 관계를 살리는 힘이라는 것을.
느리게 사는 사람만이
사람을 깊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예전에는 기도를 할 때조차
내가 준비한 말들이 앞섰고
하나님께 무엇을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매여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도는 종종
“일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시간”이나
“어떤 문제를 털어놓는 상담의 형식”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고
기도의 순간을 ‘머무름의 시간’으로 다시 받아들이기 시작하자
기도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다.
기도는 말을 잘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었다.
말이 없어도 괜찮았다.
심지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그 침묵의 공간이
기도였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영혼의 회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영혼은 시끄러운 순간에는 자라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만 자라고
침묵 속에서만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침묵 속에서만 자신을 다시 만난다.
이제 나는 침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다시 채우시는 시간이었다.
속도를 늦춘 지금
나는 나의 가장 깊은 공간에서
이 사실을 자주 깨닫는다.
하나님은 나에게 ‘빨리 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천천히 와도 괜찮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천천함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자라고 있었다.
이 모든 변화가 쌓이면서
나는 하루의 결이 바뀌는 경험을 하고 있다.
아주 작은 순간들까지
하나의 기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아주 짧은 숨조차
하나님과 연결되는 통로가 되었다.
아주 조용한 마음속 움직임까지
하나님이 건드시는 온기로 느껴졌다.
이 자리까지 오는데 오래 걸렸지만
나는 이제 확신한다.
속도를 늦추는 삶은
결코 뒤처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발맞추는 삶이라는 것을.
그 속도에서만
내 영혼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속도를 늦추며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 더 쌓였을 때,
나는 내가 그동안 붙들고 있었던 ‘성공의 정의’가 천천히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 흔들림은 혼란이나 상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진한 자유로 이어지는 흔들림이었다.
예전의 나는 성공을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추어 이해했다.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이뤄냈는지.
그 기준에 닿지 못하면
내가 뒤처진 것 같았고,
그 기준보다 조금 앞서 있으면
잠시 안도하면서도 더 큰 불안을 끌어안아야 했다.
그런데 속도를 늦추며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자
나는 그 기준들이 사실은 나를 지치게 만들던 틀이라는 것을 서서히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깨달음이 마음 속에 떠올랐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성공은
내가 바라보는 성공과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다.”
하나님은 나의 성취보다
내가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먼저 보신다.
행동의 속도보다
마음의 방향을 중요하게 여기시고,
겉의 결과보다
영혼의 건강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신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성공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 안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성공이란,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까운 삶.
성공이란,
내 영혼이 부드럽게 숨 쉬는 삶.
성공이란,
사랑할 힘을 잃지 않는 삶.
그리고 성공이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그 느린 걸음 그 자체였다.
나는 이 깨달음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그 고요한 정의가
내 삶의 중심에서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속도를 늦추면
삶 전체의 구조가 조용히 재정렬된다.
해야 하는 일들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방식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나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해”가 기준이었다면,
지금은
“나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해”가 기준이 되었다.
그 기준이 변하는 순간부터
이상하게도
내가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동안 나 혼자 이고 지고 있던 삶의 짐을
하나님께 조금씩 내어드리는 느낌이었다.
이 변화는 아주 구체적으로 일상 속에 나타났는데,
그 중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마음을 지나치게 앞세우지 않는 일”이었다.
예전의 나는 무엇을 하든
결과를 너무 빨리 예상했고
그 예상 안에서 지쳐 버리곤 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에
마음이 먼저 달려가 불안을 키우고,
실패를 상상하며 미리 긴장하고,
사람들의 반응까지 혼자 예측하며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런데 속도를 늦추니
결과를 너무 앞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이
더 이상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마음이 현재에 머물기 시작하자
미래를 과도하게 끌어당길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그 자리에 생긴 것은
이전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깊은 ‘신뢰’였다.
그 신뢰는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신다”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을 통해
조용히 증명되어 가는 믿음이었다.
빠른 속도에서는 절대 자라지 않는 종류의 믿음이었다.
이 신뢰가 자라자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두려움들도 조금씩 힘을 잃기 시작했다.
삶이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라는 마음이 생겼고,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하나님이 이 시간 속에도 함께 계신다”는 감각이 나를 지탱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이 믿음은 속도를 늦출 때만 보이는 종류의 믿음이었다.
빠르게 살면
믿음은 늘 ‘이론’이 되고
기도는 늘 ‘요청’이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늘 ‘의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느리게 살면
믿음은 일상이 되고
기도는 숨이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자연스러운 동행이 된다.
이제,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보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걸음 안에서만
내 영혼도 숨을 쉬고
사랑도 자라고
평안도 머물 수 있다는 것을.
속도를 늦추며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도 바쁘게 살면서 붙들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내 마음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애써 붙들고 있었던 ‘대체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바쁨 속에서 나름의 위안을 찾았다.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감각은
잠시나마 나에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인을 주었고,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 달리는 일은
내가 정체되지 않았다는 착각을 주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고 나니
그 모든 위안이 얼마나 얇고 금방 흩어지는 종류였는지
비로소 온전히 보였다.
바쁨으로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고
성취로는 영혼이 숨 쉬지 못했다.
영혼은
사랑과 고요 속에서만 회복된다.
하나님 안에서만 제자리를 찾는다.
빠른 속도는 그 사실을 가리기만 할 뿐
결코 내 영혼을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속도가 느려진 지금의 나는
외로운 순간에도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는다.
외로움은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외로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감각이
전보다 훨씬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외로움이 오면
마음을 채우기 위해 무언가를 더 열심히 했고
사람을 찾거나, 새로운 목표를 만들거나,
할 일을 억지로 늘리곤 했다.
그런데 속도를 늦춘 지금은
외로움이 찾아오더라도
그 자리를 피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외로움 속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부드러운 인식이 자리 잡으며
외로움은 나를 흔드는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조용한 통로가 되었다.
어떤 날은
마음이 괜히 허전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때 나는 이제 예전처럼 급히 무언가로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말없이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둔다.
그러면 설명하기 어려운 평안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안으로 스며들어 온다.
그 순간을 겪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외로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외로움은 빈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스며드는 창이 되었기 때문이다.
속도를 늦춘 삶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였다.
빠르게 살던 시절에는
나는 늘 나보다 앞에 있는 사람을 기준 삼았고
조급함은 나와의 관계를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있었다.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
더 앞서 나가야 한다는 부담,
뒤처지면 안 된다는 두려움.
그런 마음들이 얽혀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온전히 친절하지 못한 날들이 많았다.
하지만 속도가 늦춰지자
내가 나에게 보냈던 부정적인 내면의 시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조금 늦어져도 괜찮았고
어떤 순간에는 멈춰 서 있어도 괜찮았다.
그 괜찮음은
아무에게서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느린 걸음 속에서
조용히 확인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내 속도를 탓하지 않으셨다.
내가 더 빨리 성장하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않으셨고
내가 흔들리는 순간에도
“왜 이러냐”고 묻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내가 숨을 고르는 순간마다
나를 기다리셨다.
마음이 지쳐 주저앉는 순간에도
함께 앉아 계셨다.
내가 천천히 걸을 때
그 느린 속도에 맞춰
조용히 걸음을 맞춰 주셨다.
이런 사랑을 반복해서 경험하자
나는 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도
자연스럽게 부드러워졌다.
나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는 힘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자신을 괴롭히던 날들이 줄어들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마음이 약해졌고
이전보다 훨씬 편안한 호흡으로
하루를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한 가지 사실을 더 깊게 만들어 주었다.
속도를 늦추는 삶은
단순히 몸의 속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의 리듬을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다시 조율하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이 고백을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천천히 사는 삶은
내가 더 게을러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나의 영혼은 그 사실을 배워 가고 있다.
속도를 늦추며 살아가는 삶이 점점 더 익숙해지자
나는 이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빠른 삶을 살았을 때 가장 많이 잃어버렸던 것은
사실 ‘사람’이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졌던 연락들,
마음은 있지만 챙기지 못했던 작은 배려들,
듣고 싶지만 듣지 못했던 누군가의 고백들.
나는 그 모든 순간들에서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었지만
그때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속도를 늦춘 지금의 나는
그 잃어버린 순간들을 떠올릴 때마다
작은 아쉬움과 함께
하나님이 내게 주시던 신호들을
그때는 거의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곤 했지만
내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그 메시지들을 흘려보내며 살았다.
대화 중 잠깐 머뭇거리는 상대의 눈빛,
장난처럼 던진 말 속에 감춰진 진심,
누군가가 내게 조심스럽게 기대고 싶어 하던 순간.
그 모든 것은
내 삶이 충분히 느려졌다면
내가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사람을 깊게 경험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그 잃어버림은 결국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흐름을
은근히 가리고 있었다.
속도를 늦춘 지금에야
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예전처럼
‘무엇을 말해 줘야 할까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
내가 어떤 답을 줘야 할까’
같은 고민보다
먼저 그 사람의 마음 온도를 느끼는 일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사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내게 새로운 감각이었다.
예전의 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상대의 감정을 해석하려 노력했지만
속도를 늦춘 지금은
그저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스며드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깨닫게 되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선물은
내가 무엇을 해 주느냐보다
내가 그 순간 얼마나 함께 머물러 주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머물러 준다는 것은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이고,
그 사람의 감정을 받아주는 것이며,
그 자리에서 서둘러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해결은 사랑이 아니다.
머무는 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이 머무름의 능력은
빠른 삶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다.
느린 삶 속에서만
관계는 깊어지고,
사랑은 뿌리내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사람을 통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된다.
이 깨달음이 쌓여 갈수록
나는 이전보다 훨씬 천천히 움직이게 되었고
그 천천함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전체가
부드러워지고 깊어졌다.
예전에는
뉴스 한 줄,
사람들의 말 한마디,
작은 오해 한 번에도
마음이 금방 요동치곤 했다.
그런데 속도가 느려진 지금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조금 더 길고 넓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부정적인 일에도 즉시 반응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고,
사람들의 실수에도 예전보다 훨씬 너그러워졌고,
세상의 복잡한 변화를 보면서도
이제는 이유 없는 두려움에 휩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삶의 속도가 느려지면
하나님께서 이미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더 자주,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빠른 삶은
내가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해야 한다는 착각을 준다.
하지만 느린 삶은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고 계신다는 진리를 가르친다.
이 깨달음은
내 마음에서 아주 묵직하고 따뜻한 평화를 만들어 주었다.
비록 내 삶이 완벽하지 않아도,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흐르지 않아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복잡할 때가 있어도,
나는 이제 두려움에 이전처럼 휘둘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그 자리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빠르지 않지만
결코 늦지 않으신 분이다.
그분의 속도는
늘 사랑의 속도였고
그 속도에 발맞춰 걸어가는 삶이
결국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조금씩 배워 가고 있다.
속도를 늦춘 삶 속에서 가장 크게 변화한 것은
‘시간’에 대한 내 태도였다.
예전의 나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해야 할 일은 많고
하루는 빠르게 흘러가고
달력은 끝없이 채워져야 했고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어딘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함이 따라붙었다.
그 불안은 내 삶의 기본 배경처럼 깔려 있었고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시간이 충분하다는 감각은 거의 오지 않았다.
되려 시간이 더 빨리 달아나는 느낌을 줄 뿐이었다.
그런데 속도를 늦추자
시간의 얼굴이 달라졌다.
시간은 늘 부족한 것이 아니라
늘 충분히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빠르게 살 때는
시간이 ‘나의 경쟁자’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은 전혀 다르다.
시간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며
그 선물은
내가 사랑하고, 머물고, 숨을 고르고, 회복하고,
하나님과 함께 걷기 충분할 만큼
언제나 필요한 만큼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예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을 때가 많다.
“넌 시간에 쫓기고 있는 게 아니야.
그저 너의 마음이 빨리 달려가고 있을 뿐이야.”
속도가 늦춰지니
시간은 더 길어졌다.
하루가 갑자기 더 많은 분량을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하루가 내 마음 안에서
훨씬 넓어지고 여유로워졌다.
똑같은 24시간인데
그 시간이 내 삶에 스며드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아침에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는 시간이
이전보다 길어졌고
커피 향을 느끼는 순간을
서둘러 넘기지 않게 되었고
가벼운 산책조차
한 편의 짧은 기도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이런 사소한 순간들을
어딘가 ‘낭비하는 시간’으로 여겼는데
지금은 안다.
그 순간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내 영혼을 다시 채우시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속도를 늦추며 살아가면
시간이 지나가는 방식이 바뀐다.
하나님께 가까운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늘 충분하고
늘 넉넉하고
늘 평화로 가득하다.
나는 이제 이 느림의 시간 속에서
하루의 끝을 맞는 방식을
전과 전혀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오늘도 해야 할 걸 다 못 했네”
라는 생각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면
지금은
“오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구나”
라는 고백이 먼저 떠오른다.
그 고백 하나가
마음의 무게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속도를 늦춘 삶의 또 하나 중요한 선물은
‘여유로운 시선’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시절에는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반응했고
사람의 실수에 날카로워졌고
돌발 상황에 과도하게 긴장했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면
흔들림이 컸다.
하지만 속도가 느려진 지금의 나는
문제가 생겨도
조금 더 기다릴 수 있고
사람의 실수를
예전보다 훨씬 부드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돌발 상황에서도
당황보다 호흡을 먼저 선택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 느림 속에서
하나님이 나의 시선을 다시 빚어 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점점 더 자주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에게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결론내리고
빠르게 반응하는 삶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상황이 아무리 복잡해도
먼저 멈추고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여유를
내 안에 만들어 가고 계셨다.
이 여유는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천천히 자라난 선물이었음을
나는 이제 확신한다.
그리고 이 여유가 자라날수록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있다.
삶은 내 힘으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으로 붙들고 계신 여정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는 솔직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속도를 늦추며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을
더 가깝게, 더 진하게, 더 분명하게 경험한다.
그리고 그 고요한 경험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
속도를 늦추는 삶을 오래 지속하다 보니
나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변화를 깊이 체감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욕망의 모양’이 바뀌는 경험이었다.
빠르게 살 때는
더 많은 성취, 더 좋은 결과, 더 빠른 진전,
이 모든 것들이 내 욕망을 지배했다.
조급한 마음은 늘 새로운 것이 필요했고
새로운 것들은 잠시 마음을 만족시키는 듯하지만
곧바로 더 큰 갈증을 가져왔다.
지금 돌아보면
그 갈증이 결코 채워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욕망 자체가 하나님과 멀어진 자리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삶의 속도가 느려지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하자
욕망의 방향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예전엔
‘더 빨리, 더 높이, 더 크게’가 기준이었다면
지금은
‘더 깊이, 더 단단히, 더 진하게’가 기준이 되었다.
내가 바라보는 목표가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마음의 방향이 달라졌다.
욕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망의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다시 배우게 된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빠르게 아무것이나 붙드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 안에 오래 머무는 삶이구나.”
이 깨달음이 찾아온 순간
내 마음의 여러 결이
오래전부터 틀어져 있던 자리에서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나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조급함이 생겼고
조급함은 욕망을 더 자극하며
욕망은 다시 나를 불안으로 몰아넣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욕망이 하나님 앞에서 정리되는 과정이
마음에 더 큰 평화를 남긴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도
그 열망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면
조급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나님이 그 열망을 정리해 주시고
필요한 때를 알려 주실 것이라는 신뢰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더 이상 ‘언제’ 라는 질문에 쫓기지 않는다.
예전에는 모든 것의 타이밍이 불안했고
조금만 늦어져도 나만 뒤처진 것 같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시간표가 이미 나를 향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부드럽게 잡아 준다.
이 신뢰가 생기자
내 욕망은 전보다 훨씬 더 단순해졌다.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더 바르게 걷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고
더 앞서고 싶다는 욕심보다는
하나님과 발맞추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삶의 무게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이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즉시 해결해야 하는 사람처럼 살았지만
지금의 나는
문제가 생겨도
하나님의 임재로 먼저 돌아오는 마음이 생겼다.
문제를 해결하는 속도보다
하나님의 방향을 먼저 구하는 마음.
이 작은 변화가
내 삶의 구조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깊은 통찰을 주었다.
하나님은 내가 빨리 움직이기를 바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내가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속도로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그리고 그 속도는
나는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속도였다.
나는 다만 너무 오랫동안
내 속도대로만 살아오며
그 속도를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야 나는
하나님의 속도가
언제나 나를 살리는 속도였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느린 속도는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바로 오지 않을 때,
기도의 응답이 더디게 느껴질 때,
문제가 빠르게 해결되지 않을 때.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나에게 말씀하신다.
“조금 더 천천히 와도 괜찮다.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
이 음성은
내 삶의 가장 깊은 위로이자
가장 큰 평안이다.
빠르게 사는 삶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음성이다.
나는 이 음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앞으로도 느린 걸음을 선택하려 한다.
느린 걸음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
얼마나 깊게 나를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부드럽게 이끌고 계신지
전보다 훨씬 자주, 훨씬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느린 걸음을 통해
나는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진짜 삶의 결로 들어가고 있다.
속도를 늦추며 살아온 이 긴 여정을 돌아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이 길을 혼자 걸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예전의 나는 늘
내가 모든 것을 직접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하나님도 때로는
내가 준비된 상태로 나아가기 전에는
가까이 오지 않으실 것처럼 느끼곤 했다.
하지만 느림 속에서 다시 배우게 된 하나님은
내가 알던 분보다
훨씬 부드럽고
훨씬 기다려 주시고
훨씬 깊이 나를 품어 주시는 분이었다.
내가 지친 순간에도
하나님은 그 속도에 맞춰 앉아 계셨고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도
하나님은 나를 재촉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내가 멈춘 바로 그 자리를
함께 머물러 주셨다.
이 사실을 인정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조금씩 풀어낼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을 ‘바쁨을 요구하는 분’으로 생각해왔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은 나에게
“살아가는 속도를 줄이고,
내가 주는 사랑이 너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스며들 수 있도록
잠시 멈춰보라”고
끊임없이 초대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 느림의 초대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지금은 내 삶의 중심을 부드럽게 지탱하는
하나님의 가장 따뜻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하면 응할수록
내 영혼은 조금씩 회복되고
삶은 더 온전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는 요즘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방식이
정말 놀랍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분은 크게 움직이지 않으신다.
소란스러운 방식으로 끌어당기지도 않으신다.
오히려
내가 조용해진 틈,
내가 쉬어가는 순간,
내가 멈춰 서 있는 찰나에
가장 많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빠른 속도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위로는
복잡한 마음에서는 스며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음성은
조용한 순간에만 들리는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느림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난 뒤로
일부러 시간을 늘리려 애쓰는 것보다
마음을 천천히 내려놓는 데 더 집중하게 되었다.
마음을 내려놓으면
시간이 자연스럽게 넓어지고
시간이 넓어지면
하나님의 임재가 더 깊이 느껴지고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면
삶 전체에 부드러운 확신이 깔린다.
그 확신은
모든 것이 당장 풀릴 것이라는 식의 얕은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붙들고 있다는 깊은 인식에서 비롯되는 확신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삶을 서둘러 넘기지 않으려 한다.
서두름 속에서는
하나님조차도 내 마음에서 멀어져 보이지만
느림 속에서는
하나님이 늘 바로 옆에서
내 발걸음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정해진 계획대로 하루가 흐르지 않고
갑자기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기도 하지만
그럴 때조차
나는 이전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조금 혼란스러워도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감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조용하고 깊고 지속적이다.
이전처럼 큰 감정의 파도는 아니지만
그 조용한 평안이 오히려
훨씬 더 오래 남는다.
나는 이제야 안다.
속도를 늦추는 삶은
단순히 여유를 찾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두신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 리듬 속에서
나는 조금씩, 아주 천천히
진짜 나 자신을 다시 만나고 있다.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나,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나,
빠르게 달리지 않아도 괜찮은 나,
그런 나를 하나님 안에서 다시 세워가고 있다.
이 여정의 끝이 어디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 끝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이제는 이해한다.
하나님이 내 걸음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앞서서 모든 것을 예상하며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
나는 다만
하나님이 만드신 속도에
그분의 리듬에
그분의 사랑에
조용히 발맞추어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그 느린 걸음이
나를 살리고 있다.
속도를 늦추며 살아온 지난 시간들을 곱씹다 보면
가끔은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빨리 살아야 한다고 믿어왔을까.’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어떤 시점부터
나는 삶을 끊임없이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고
천천히 걷는 순간은 뒤처지는 순간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오래 살아오다 보니
느린 삶으로 들어오는 과정이
처음에는 어색하기도 하고
마음이 불안하기도 했다.
마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어딘가를 놓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불안이 조금씩 가라앉을 때쯤
나는 알게 되었다.
느린 삶이 낯설었던 이유는
느린 삶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무 오랫동안
빠른 삶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 역시
천천히 삶을 살아가도록 초대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이다.
그분은 조급함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으신다.
그분은 늘
여유와 침묵과 기다림을 통해 우리를 다듬으신다.
그 느린 과정이
영혼이 자라는 유일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리로 아는 데 오래 걸렸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은
빠른 삶보다 훨씬 깊고
훨씬 단단하고
훨씬 자유롭다.
그 느린 걸음 속에서
나는 나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따뜻해졌고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이전보다 확연히 깊어졌다.
이 친밀함은
어떤 지식이나 이론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물고
함께 기다리고
함께 천천히 걸어갈 때
비로소 자라나는 것이다.
어떤 날은
아무도 모르게 마음이 지쳐 있는 날도 있다.
별일 없었는데도
막연한 피로가 밀려오는 날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날조차
나는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침 속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강할 때뿐 아니라
우리가 약해질 때도
같은 속도로 걸어가신다.
우리의 걸음이 느려지면
그분의 걸음도 함께 느려지고
우리가 멈추면
그분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머물러 주신다.
그런 하나님을 다시 발견한 순간부터
나는 삶을 더 이상
내 힘으로 끌어가야 하는 무거운 길로 보지 않게 되었다.
삶은 나 혼자 개척해야 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동행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빠른 속도로 달릴 필요가 없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
심지어 잠시 멈춰 서도 괜찮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이 느림의 길을 계속 걷고 싶다.
삶이 어떻게 흘러가든
문제가 찾아오든,
기쁨이 오든,
혹은 예기치 못한 변화가 오더라도
그 모든 순간을
하나님과 함께 천천히 걸어가고 싶다.
그 느린 걸음 속에는
서두름이 주지 못하는 평안과
빠른 속도가 주지 못하는 기쁨이
조용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그리고 이렇게 느린 걸음을 살며
나는 오래전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속도를
다시 되찾고 있다.
그 속도는
결코 화려하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지만
내 영혼을 살리는 가장 부드러운 흐름이다.
이제 나는 그 속도에 나를 맡기며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 속도에서만
하나님의 사랑이 깊어지고
영혼이 단단해지며
사람을 사랑할 여유가 생긴다.
나는 천천히 사는 이 길이
결코 약함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걷는
진짜 강함의 길이라는 것을
이제야 진심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조금씩, 아주 천천히
새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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