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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마흔의 마음이 가장 흔들릴 때 붙잡아 준 철학

마흔이라는 나이는 이상하다.
젊다고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고,
늙었다고 하기엔 여전히 지나치게 많은 것을 꿈꾼다
어떤 날은 내가 성숙해졌다는 착각을 하고,
어떤 날은 서른도 되기 전에 알았어야 했던 것들을
이제야 배우고 있다는 자책이 밀려와
마음 한쪽이 쓸쓸해진다..

그런 마음이 헛헛하고 쓸쓸한 시기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누가 권한 것도 아니었다
서점의 한쪽에서 표지의 칼 같은 문장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을 뿐이다
무언가를 크게 바꾸고 싶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삶을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기 때문에
무언가에 기대고 싶었던 때였다.

책장을 넘기기 전까지는
이 책이 나를 조금도 위로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다.
위로라는 건 따뜻하고 다정하고
내 편이라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정반대였다.
쇼펜하우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불친절했고,
너무나 예리하게 정확했고,
잔인할 정도로 솔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히려 그 차가움 때문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마흔에 가까워지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마음의 무게가 늘어난다.
그 무게는 대단한 실패나 거대한 사건에서 오지 않는다.
대부분은 지루한 반복 속에서 깎여나가며 생긴다.
직장 생활 속의 누적 된 피로들,
수많은 관계에서의 누적 된 상처들,
스스로에게 실망한 날들,
잘하고 싶은데 늘 제자리에 서 있는 느낌.
그 모든 작은 파편들이 어느 순간
한 인간의 가슴을 묵직하게 만든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감정들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한다.
특히 ‘의지’와 ‘결핍’에 대한 그의 문장은
지금의 나에게 칼날처럼 들어왔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왜 괴로워하고,
왜 어떤 날은 잘 견디다가
어떤 날은 무너지는지,
그가 던지는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그냥 있는 사실 같은 느낌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순간은
내 지나간 세월들의 표정이었다.
잘 살아보려고 애쓰던 그 시절,
뒤처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날들.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썼던 저녁들.
그러한 것들에 마음 쓰면서 정작 중요한 마음들은
모두 흘려보냈던 세월들.
그 모든 시간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사람은 언제나 어떤 결핍을 향해 움직인다고.
그리고 결핍이 사라지는 순간 욕망도 사라지고,
욕망이 사라지면 우리는 정지한 존재가 된다고.
그러나 결핍을 채우려는 마음이야말로
우리 고통의 근원이라는 사실도
피할 수 없다고 말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어쩐지 웃음이 났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왜 그렇게 지쳐 있었는지
왜 행복의 순간마다 금방 불안이 쫓아왔는지
왜 많은 것을 이뤘다고 생각한 날에도
허전함이 사라지지 않았는지
이제야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행복이란 결국
결핍이 잠시 멈춘 순간의 감정인데
나는 그 순간들조차 오래 붙잡지 못했다.
왜냐하면 결핍은 내 마음대로 멈춰지지도 않았고
욕망은 늘 다음 것을 향했으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묘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살면서 가장 나를 괴롭히던
‘왜 아무리 노력해도 만족스럽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처음으로 답을 들은 느낌이었다.
이건 내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의 구조 자체가 그런 거라고
쇼펜하우어가 말해준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나를 미워할 이유가 조금 줄어들었다.
어쩌면 괜찮아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 삶에서 지나온 많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때로는 사랑하면서 상처를 주고
때로는 상처받기 싫어서 사랑을 피했고
때로는 나를 지키기 위해 벽을 세웠고
때로는 누군가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타인에게 기대하는 감정적 욕구와
그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너무도 정확하게 짚어낸다.
책을 읽어 나가면서
문득 그동안의 관계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서운했던것들,
남이 나에게 실망했던 순간들,
말하지 않고 쌓아두었다가
한꺼번에 폭발했던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이
서로의 결핍이 부딪혀 만들어낸 파문 같았다.

누가 잘못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채워줄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인정하지 못하면 기대하게 되고
기대하면 실망이 따라온다.
실망이 반복되면
사람은 지친다.
나는 그 지침 속에서
많은 관계를 놓쳤던 것 같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흔이라는 나이로 서 있는 지금의 내가
마치 어떤 경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도, 노년도 아닌
애매한 어둠 속에서
앞의 길과 뒤의 길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기.
그 경계 위에서
내가 놓쳤던 것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마흔이 되어 알게 되는 지혜를 제공해 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평생 모른 채 지나갈 수도 있는 어떤 진실을
지금이라도 보게 해주는 책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읽는 동안 불편했고,
읽고 나선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졌다.

나는 이 고요함이
내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말해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느리게 살아 보자.
조금 덜 기대하자.
조금 더 내 자신을 지키자.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기댈 수 있는 자리를
내 안에서 먼저 만들자.

이 깨달음은
책의 마지막 장이 아니라
읽고 나서 며칠을 지나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 속에서
서서히 찾아왔다.

그게 오히려 더 깊었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한동안은
문장들이 그대로 가슴 안에 남아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글은 위로를 해주는 문장이 아니라
내가 피하려던 진실을 가만히 들춰내는 방식이어서
읽을 때보다 읽고 난 뒤가 더 오래 남았다.

출근길에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흔들리면서도
나는 책에서 읽은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행복해지고,
그만큼 불행해진다.’
이 단순한 말이 왜 그렇게 깊게 남았는지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문장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싶었던 것 같다.

살면서 가장 지치고 허무한 순간은
행복이 사라졌을 때가 아니라
행복이 왜 계속 유지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였다.
조금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예전의 불안으로 돌아가고
어떤 날은 너무 잘 견디다가
어떤 날은 작은 일에도 마음이 무너지고.
그런 반복 속에서 나는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지
계속 스스로를 의심했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으며
처음으로 그 의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행복은 유지되는 게 아니라
잠시 머무르는 감정이라는 것,
욕망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갈증 속에 남아 있다는 것.
이걸 받아들이는 순간
행복은 더 이상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바람을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
오히려 더 자주, 더 가볍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들이
마음 속 어딘가에 오래 잠겨 있던
그리고 해소 되지 않고 늘 무겁게 느껴지던 것들을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잘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좋은 사람이어야 하고
좋은 딸이어야 하고
좋은 아들이어야 하고
좋은 엄마, 좋은 아빠
좋은 동료, 좋은 배우자,
좋은 인간이어야 한다는
스스로를 몰아 세웠던 그 무거운 기준들..
그 기준에 닿지 못할 때마다
나는 나를 탓했고
그 탓은 또 다른 상처를 만들었었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사람은 자신보다 타인을 더 잘 속일 수 있다고.
우리는 어느 정도 거짓말을 하면
남을 설득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내가 내게 했던 온갖 작은 거짓들을 떠올렸다.

나는 괜찮은 척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힘들지 않다
이 정도는 아무 문제 없다
다들 이 정도는 버티니까
나도 버텨야 한다.
이런 말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되뇌며
진짜 감정들을 묻어두었다.
그 결과
나는 언젠가부터
내 감정과 멀어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책을 읽은 그날 밤
불도 끄지 않은 채
방 한가운데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를 괴롭히던 것들의 실체가
조금씩 선명해지는 느낌이었고
그게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더 늦기 전에
이걸 봤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준비하다가 문득
내가 더 이상 예전처럼
나를 급하게 다그치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만든 압박이 나를 괴롭힌 것뿐이라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인지
그때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물론 그 변화는 아주 느리고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내 안에서 어떤 작은 기울기 하나가
조용히 방향을 바꿨다는 것을.

이 책은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런 솔루션을 제공해 주는 책이 아니라
삶의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현실이 바뀌는 게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뀌게 해 주는 그런 책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생각보다 오래 남는다.

회사에서 잠깐 쉬는 시간에 창밖을 보다가
불현듯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가슴 한가운데 어둠이 아니라
고요함이 자리 잡는 순간.
이전의 나는 이런 순간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항상 뭔가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진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잠시 멈추는게 두렵지 않다.
멈춘다고 해서
내가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내가 잃어버렸던 감정들이
천천히 환기되는 것 같았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인생의 어느 지점인지
아직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나이에 책 한 권이 나에게 준 영향은
스무 살 때나 서른 살 때와는
완전히 다른 깊이를 가졌다는 것이다.
삶의 절반을 지나온 사람에게
‘진실’은 더 큰 무게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이 나이에야 비로소 생기는 것 같다.

어느 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와 앉아 차를 마시다가
또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내 책임’으로 돌려왔다는 사실을…
삶은 원래 불완전하고
관계는 언제나 오해의 여지가 있고
감정은 늘 변하는 것인데
나는 이상하게
그 모든 불완전함을
내가 더 잘 했어야 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내몰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잔인한 방식이었는지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그동안
내게 너무 많은 짐을 올려놓고
그걸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힘들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버티고 있었다.

그 버티기가 어느 순간
삶 전체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책을 읽은 뒤에야
그 피로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게 된 순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나를 무너뜨리는 건
언제나 큰 사건이 아니라
작은 결핍과 사소한 자기비난이라는 걸.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삶이 아주 조금
살만해졌다.

나는 이 책을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으면서도
쉽게 추천하지 못하겠다.
이 책은
위로받고 싶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어느 순간
도망치지 말고
현실을 그대로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책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며칠이 지나면서
나는 이상하게도 더 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갔을 장면들이
갑자기 의미를 띠며 되살아났다.
오랜 친구와의 다툼,
가족에게 괜히 짜증을 냈던 날,
회사에서 혼자 감정을 삼키고 돌아오던 저녁,
내가 나를 미워했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쇼펜하우어의 문장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특히 인간의 욕망과 실망에 대한 그의 글은
내 지난 관계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나는 늘 누군가를 너무 깊이 좋아하거나
너무 빨리 실망하곤 했다.
그게 나의 성향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나니
그 안에 감춰진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에게서
내가 못 가진 것을 기대했다.
그 기대는 바램으로 바뀌고
바램은 요구로 바뀌었고
요구는 실망으로 이어졌고
실망은 결국 내 자신을 삶의 지침 가운데로 몰아넣었다.
이 과정은
실제로는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 결핍이 만든 흐름이었다.

어쩌면 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구한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나의 불안을 잠재워 달라고
내심 요구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사실을 인정하는 건
조금 아프고
조금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가벼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내가 왜 그렇게 흔들렸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아서.

책의 여러 문장 중에서
특히 오래 머문 문장이 있었다.
“인생의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그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은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장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고통을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그 글귀 앞에 나는 한동안 멈춰 서 있게 되었다

마흔을 앞두고 나는
삶의 여러 고통을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방식으로 해석해왔다.
어떤 날은 운명을 탓했고
어떤 날은 사람을 탓했고
어떤 날은 나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그 해석의 방식 자체가
나를 더 깊이 고통 속에 가둬두었을 뿐이라는 걸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때
삶의 무게가 조금 달라진다.
내가 나에게 향하던 날카로운 비난이
조금 무디어지고
상처를 들여다보는 방식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이 변화는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조용히 스며드는 방식으로 일어났다.
정말 별일 아닌 순간에
그 변화가 보였다.

회사에서 회의가 길어져
몸과 마음이 동시에 피곤해진 날이었다.
보통이라면 감정이 먼저 올라와
날카로워지고
스스로에게도 짜증이 나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피곤한 나를 그냥 피곤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그래, 오늘은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이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예전 같았으면
‘왜 이렇게 에너지가 없지,
왜 집중이 안 되지,
왜 나는 항상 이런 식이지?’
하며 나를 다그쳤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너무 낯설고
그래서 조금 놀라웠다.
아무도 모르는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나에게는 큰 파문이었다.

책의 또 다른 장면은
관계의 허망함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통찰이었다.
사람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채울 수 없다는 문장.
이 문장은
마치 오래 잊어버렸던 숙제를
다시 꺼내 들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관계가 어떤 완전함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누군가와 깊어지면
내 결핍이 조금은 줄어들 것이라는
희미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 기대를
조금씩 깎아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고
사소한 무심함에도 상처받고
애써 참다가도
내가 먼저 멀어지는 날들이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감정의 반복이
결국 인간의 본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하지만
그 기대를 실현할 능력은
처음부터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
이 진실을 받아들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사람들에게 더 관대해졌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내가 상처받은 이유 중 상당수가
그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몰래 기대했던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은 데 있었다는 걸
조심스럽게 인정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은
관계를 가볍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 관계 안에서 내가 너무 흔들리는 일이
조금 줄어들게 했다.
상대에게서 완전함을 기대하지 않으니
서운함이나 실망도
예전처럼 깊게 박히지 않았다.

어느 날 주말,
카페에서 혼자 앉아 책을 다시 펼쳤다.
문장 몇 개를 다시 읽고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원했던 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인정받는 삶이었다는 것.
하지만 나는 늘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나를 재고 있었다.

쓸데없이 남의 기준에
내 자존감을 걸어두고
그게 흔들릴 때마다
나도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쌓여
어느 순간 삶이 피곤해졌다.
그 피로를
나는 오랫동안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나는 나를 계속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돌아보게 해준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책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가을 햇살이
유리창에 부딪혀 반사되는 모습이
왜인지 모르게
더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 일도 없는데
살아 있는 감각이
조금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날
내가 살아온 방식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내가 과거에 했던 선택들을
다시 하나씩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떤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후회가 남았고,
어떤 선택은 당시에는 최선이었지만
지금의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선택들은
그 시절의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최대한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였다는 걸
이제는 조금 인정해도 될 것 같았다.

오랫동안 나는
과거의 나를 미워하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썼다.
그때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는지,
왜 그렇게밖에 행동하지 못했는지,
조금만 더 성숙했다면
지금의 삶이 더 달라졌을 것이라고
끝없이 자책했다.
그 자책은
내가 인생을 바라보는 렌즈를
무겁게 뒤틀어 놓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를 읽고 나니
그렇게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던 이유가
결국 ‘완전해야 한다는 강박’에 있었다는 사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완전한 선택을 해야 하고
완전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그 불가능한 기준이
나를 계속 소모시키고 있었다.

인생의 대부분은
미성숙한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의 연속이고
그 결정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는 단순한 사실을
나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잊고 살았을까.
완전함의 그림자를 좇느라
내가 나를 얼마나 괴롭혀 왔는지도
그제야 조금 보였다.

어느 날 퇴근길에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그 얼굴은 지친 사람의 얼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미워지지 않았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버티고
끊임없이 살아내고
여기까지 온 사람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누군가에게는 시작이고
누군가에게는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읽은 후 나는
이 나이가 오히려
삶을 다시 정비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모두
어느 순간 삶의 속도를 줄여야 한다.
허겁지겁 달려오던 방식으로는
그 어떤 결핍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생이 어느 시점에서
몸으로 알려준다.
나는 그 시점이
지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글은
삶이 본래 불완전하고
사람은 본래 모순적이며
고통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말한다.
이 문장들은 처음엔 차갑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불가능한 기준에서 나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이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것,
그게 어쩌면
마흔을 살아내는 데 필요한
가장 큰 용기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니라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삶으로 옮겨가는 용기.

그 용기는
어떤 거창한 결심에서 오지 않았다.
작고 사소한 일상 속 순간들에서
조금씩 자라났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도 잘 버틸 수 있을까’ 대신
‘오늘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보고 싶지?’
라고 묻는 방식의 변화.
회사에서 실수를 했을 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대신
‘실수도 하는 내가 사람이지’
라고 스스로를 감싸는 마음의 변화.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생겼을 때
원망하기보다
그 사람도 자기 삶을 견디느라
여유가 없었을지 모른다고
조금 너그럽게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이런 변화들이
지금의 나를
몇 달 전의 나보다 훨씬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면의 평온,
관계의 온도,
의지의 방향,
자기 자신과 맺는 태도.
그런 것들은
단 하루 만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오래 들여다보고
천천히 쌓아가며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내 삶을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문제처럼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치우면
어느 순간 괜찮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삶은 치워야 할 문제의 목록이 아니라
그 문제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의 총합이라는 것을.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나는 삶을 조금 더 부드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부족함도, 실수도, 고통도
이제는 나를 실패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것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어떤 질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책 한 권이
인생을 완전히 바꾸진 않는다.
그런 마법은 없다.
하지만 어떤 책은
내면의 빛이 아주 희미해져 있을 때
그 빛을 조금 더 잘 볼 수 있게
눈을 적셔 주는 역할을 한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가
내게 그랬다.

나는 이제
어떤 진실도
예전처럼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그 진실들이
나를 부숴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 더 자유롭게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삶의 모든 순간을 너무 설명하려 했던 것 같다.
무슨 일이 일어나면 이유를 찾고
상대의 말 뒤에 숨은 의도를 해석하려 하고
내 감정마저도 “왜 이런 기분이 들까” 하고
계속 분석만 반복했다.
그 분석은 한동안 나를 보호해주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더 깊은 피로를 만들고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설명하려는 습관이 조금씩 약해졌다.
설명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
이해되지 않아도 흘러가는 감정들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서야 알았다.
그걸 받아들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한 번 받아들이고 나니
삶이 조금 덜 버거워졌다.

어떤 감정은
굳이 붙잡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경우도 있고
어떤 상처는
얘기하지 않고도
시간 속에서 스스로 닫히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모든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고
모든 상처를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었고
더 지치게 만들었다.

책 덕분에 깨달은 건
삶의 많은 순간들은
해석 없이도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었다.
그 의미는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냥 살아내는 과정에서
몸으로, 마음으로, 천천히 느껴지는 것.

이걸 이해하고 난 뒤
내 일상도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의 말이 마음에 걸려도
예전처럼 말의 뉘앙스를 수십 번 재생하며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고
하루 동안 미묘하게 어긋난 기분이 있어도
억지로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
그랬더니
오히려 감정이 쉽게 가라앉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마흔 즈음의 삶이
왜 이렇게 복잡한 감정들로 가득한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만큼
감정이 쌓여 있고
관계의 흔적도 남아 있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생각보다 깊게 박히기도 하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불필요하게 애쓴 기억들도
마음 깊은 곳에서 들썩인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순간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복잡한 무늬를 만든다.

이 책은
그 복잡함 속에서
하나씩 선을 풀어가는 느낌이었다.
완전히 해결하지는 않지만
엉켜 있는 매듭을
조금 느슨하게 풀어주는 느낌.
그래서인지
읽고 난 뒤 며칠은
가슴 깊은 곳이 이상하게 넓어진 것 같았다.
여유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바로잡으려는 강박이
한 톤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어느 날 밤
잠들기 전에 책에 밑줄 그어둔 부분을
천천히 다시 읽었다.
“인간의 불행은 대부분
자신의 기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내 지난 십 년의 감정이
단번에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했다.
사람들에게도,
삶에게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도.
그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나는 누군가를 원망했고
어떤 날은 세상을 탓했고
대부분의 날에는
나 자신을 탓했다.

하지만 이 문장을 읽고
조금씩 달라졌다.
누군가에게 기대를 할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저 사람은 나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삶은 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어.”
“나는 완벽한 기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이 말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삶의 무게가 조금 줄어들었다.

관계에서도 그렇다.
예전 같으면
상대의 작은 무심함도
내 마음에 오래 남았고
그 감정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그 사람도 자기 자리에서 버티느라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지.”
이 문장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상대에 대한 원망이
절반 이상 줄어든다.

물론 나는
아직도 자주 흔들리고
어떤 감정에서는 쉽게 무너지고
때로는 아주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지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감정적이라는 것,
약하다는 것,
흔들린다는 것은
결함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사실.
이 단순한 진실이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던
자기비난을 조금씩 밀어냈다.

효율, 성취, 생산성, 자기관리.
마흔까지 오는 동안
나는 이런 단어들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 단어들이
마치 내가 지켜야 할 기준처럼 느껴져
하루를 평가할 때도
그 척도들을 기준 삼았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지치면
스스로를 실패한 사람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고 난 뒤
나는 묘하게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다.
‘오늘 나는 얼마나 잘 견뎠는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고 지나온 시간이 있었는가?’
‘나는 나에게 얼마나 부드러웠는가?’
이런 질문들은
성장은 크지 않아도
삶을 훨씬 더 인간적으로 만든다.

아마 이 책을 읽은 후
가장 큰 변화는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의 변화였을 것이다.
그 변화는
내가 나에게 해온 방식이
얼마나 거칠었는지를
처음으로 인지한 데서 시작되었다.

이제는 조금씩
그 거친 마음을 내려놓고 있다.
많은 날들이 완전하지 않아도
그 완전하지 않은 날들이
내 삶을 이루는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걸 받아들이니
삶이 조금 덜 아팠다.
그리고 조금 더 따뜻해졌다.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나는
내 삶에서 ‘버티기’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렸다.
누군가는 버틴다는 표현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나는 오히려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버티는 힘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버틴다는 건
억지로 참거나
감정을 묶어두는 종류의 버팀이 아니다.
무너질 듯 흔들리면서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흔들림이 부끄럽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나는 그동안
‘흔들리는 나’를 너무 싫어했다.
나약해 보이고
의지가 없고
방향을 잡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져
그 모습을 감추려고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흔들리는 건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데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그의 문장들은
단순한 철학이 아니라
날것의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선으로 쓰여 있다.
그래서 그의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가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진다.
모순 같지만
그 문장들이
나의 현실을, 나의 본질을
그저 ‘그렇다’고 말해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회사에서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 잘 되지 않아
퇴근길 발걸음이 아주 무거웠던 날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실패의 책임을 전부 내 탓으로 돌리고
밤새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집에 도착해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이런 말이 먼저 떠올랐다.
“할 만큼 했다.
그리고 실패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오늘의 실패가 내 전체를 결정하는 건 아니다.”

그 말을 스스로에게 해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그 말은 의외로 큰 위로가 되었고
그 순간 나는
내가 조금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다.
더 이상 실패에 압도되지 않고
그 실패를
하루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 속에
그냥 놓아두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변하면
같은 일이 일어나도
느끼는 감정의 색이 달라진다.
쇼펜하우어의 책은
그 태도를 바꾸는 데
생각보다 큰 역할을 했다.
문장을 읽는 순간보다
시간이 지나
그 문장들이 축적되어 있을 때
그 힘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책을 읽고 난 후
사소한 일에도 쉽게 흔들렸던 내 감정이
조금씩 둥글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는
작은 실수 하나가
내 하루 전체를 무너뜨리는 날도 있었고
누군가의 표정 하나가
내 자존감을 덜컥 떨어뜨린 날도 많았다.
이제는 그 감정이 올라올 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거리감이 생겼다.

거리감이 생기면
감정이 지나가는 속도가 달라진다.
예전엔 감정이 오면
그 감정 속으로 떨어져버렸는데
이제는 감정이 왔다가
머물다가
조금 천천히 빠져나간다.
이 천천함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 힘이 되는지
요즘은 매일 느낀다.

어떤 날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창밖에서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진 적이 있다.
사람들은 모두 일상에 묻혀
자신의 업무로 돌아가고
핸드폰 진동이 한 번씩 울리고
거기엔 특별한 풍경이 없었는데
그저 바람 소리만으로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 순간 나는 거의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 내가 조금은 나아지고 있구나.”

마흔 전후의 삶은
떠밀리듯 흘러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해야 할 일도 많고
지켜야 할 책임도 많고
과거는 쌓여 가는데
앞으로의 길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 한가운데 서 있을 때
사람은 종종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가 잃어버린 나를
조금씩 다시 찾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아주 작은 회복의 조각들이다.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고
말로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나에게는 너무 중요했다.

어떤 날은
아침에 눈 뜨기 전
불쑥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를 더 아껴주고 싶다.”
이전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마음이나 몸이 지쳐도
늘 해야 할 일을 먼저 떠올렸고
내 감정은 늘 뒤로 밀렸다.
그러다 보니
내 안에 쌓인 피로가
어느 순간 너무 커져버렸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이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가면서
스스로에게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되고 싶지?’ 하고 묻고
저녁에 침대에 누우며
‘오늘 하루, 너 참 수고했어’ 하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연습을 하고 있다.

그 연습이
나를 무너뜨리지 않게 붙들어주는 힘이 되었다.
그 힘은 조용하지만
뿌리가 굵다.
삶의 흔들림을 견디게 하는
아주 깊은 기반 같은 느낌.

이런 감정의 변화가
책 한 권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하면
조금 과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책이 내 마음속 어딘가
아주 오래 묵혀 있던 진실을
조용히 끄집어내 준 것 같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던
감정의 꺼진 불씨를
다시 손에 들게 해준 책.

그래서 나는
누가 ‘이 책을 읽으면 뭐가 달라져?’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하지만 네 마음의 방향이
조금 달라질 거야.
그리고 그 방향의 변화가
나중에 큰 변화를 만든다는 걸
너도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책을 읽고 나서 생긴 변화 중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는 꽤 중요한 변화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전의 나는
누군가의 행동을 볼 때
대부분 그 사람의 성향이나 의도에서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를 준 사람에게서 원인을 찾았고
조금만 무심한 행동을 해도
그 무심함이 ‘나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요즘은
사람의 행동 뒤에는
말하지 않은 피로,
표현하지 못한 고통,
숨기고 있는 불안,
어쩌면 본인도 인지하지 못한 결핍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조금씩 떠올리게 되었다.
그 생각을 하고 나면
예전만큼 쉽게 상처받지 않게 된다.
상대의 행동이
나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속에서 비롯된
다른 의미일 수 있다는 것을
서서히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변화는
내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아주 깊은 층위에서 바꿔놓았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그 사람이 예상 밖의 말이나 행동을 해도
예전 같으면 그 자리에서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겠지만
지금은 한 번 더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저 사람도 자기 몫의 고단함을 안고 있는 중일 거야.’
이 한 문장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상대에 대한 감정이 조금 부드러워진다.

이걸 깨닫고 난 뒤
나는 누군가에게 서운함을 느꼈던 오래된 기억들이
새로운 맥락으로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전 마음을 다치게 했던 사람도
그 시절엔 자기 삶을 버티느라
여유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걸 알게 되니
서운함의 결이 조금 옅어지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 마음이
미세하게나마 생겼다.

이런 변화는
관계를 완전히 치료하는 건 아니지만
내 안에 오래 있었던 어떤 매듭을
조용히 풀어주는 느낌이었다.
마음의 어딘가에서
서서히 호흡이 길어지고
어떤 감정들은
이제 더 이상 예전처럼
날 뒤흔들지 못했다.

어느 날 밤
우연히 휴대폰 갤러리를 스크롤하다가
몇 년 전 찍었던 사진을 하나 발견했다.
사진 속 나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니
눈빛에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그때 나는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늘
‘잘해야 한다’는 압박과 싸우고 있었다.
그 사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짠했다.
그 시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 참 고생 많았어.
잘 버텼어.
그때의 너는 이미 충분했어.”

그 말을
지금이라도 해줄 수 있게 된 건
어쩌면 이 책 덕분이었다.
쇼펜하우어의 문장들은
내게 감정의 진실을 마주하도록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내가 잊고 살아온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나는 그날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문득 알게 되었다.
내 삶에서 가장 큰 상처는
타인이 준 상처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준 평가였다는 것을.
“너는 아직 부족해,”
“왜 이 정도밖에 못 해,”
“조금만 더 잘해야지,”
이런 말들을
수년 동안 마음속에서 반복해왔던 것.
내가 나를 괴롭히는 방식이
생각보다 훨씬 잔인했다는 걸
그날 처음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도 휑했다.
고통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쥐고 있던 무거운 돌을
잠시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그 휑함 속에서
내가 다시 채워 넣고 싶은 감정이 무엇인지
천천히 떠올렸다.

평온,
관대함,
가벼움,
그리고 조금의 용기.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삶을 더 잘 제어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감정을 관리하고
모든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걸 붙잡는 동안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지금 나는
삶을 통제하려는 대신
삶을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
어떤 날은 흐리고
어떤 날은 불쾌하고
어떤 날은 괜히 괴롭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가볍다.
그 모든 날들이
내 삶의 일부라는 사실.
이 단순한 진실이
이제는 더 이상 무겁지 않다.

어느 저녁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는 걸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가라앉는다는 건
끊어지는 게 아니라
흐르는 것이라는 걸.
흐르는 감정은
억누를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그저 지나가게 두면 된다.
그게 삶이고
그게 사람이고
그게 나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한동안 나는
내 삶을 조금 더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그냥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바라본다는 건
판단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일.
이 단순한 행위가
나를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바꾸고 있었다.

삶의 태도가 바뀌면
같은 하루도
전혀 다른 결로 느껴진다.
어딘가 단단하게 조여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면서
세상이 조금 덜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아직 멀었다.
아직도 흔들리고
아직도 버거운 일들이 많고
어떨 땐 내가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도 헷갈린다.
하지만 이제는
흔들린다고 해서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제서야
조금씩 나로 살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나는 가끔
내가 왜 이렇게 오래 마음이 지쳐 있었는지를
천천히 떠올려 보곤 한다.
마흔이라는 나이가 주는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살아오며
마음 깊은 곳에 쌓아두었던 작은 일들,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그때는 지나쳤지만
지금 생각하면 흔적이 남는 장면들.
그런 것들이 다 모여
조금씩 마음의 균열을 만들고 있었던 것 같다.

살아온 시간들이 쌓이면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변한다.
기대치도
감정도
사람에 대한 마음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다.
어쩌면 이 책은
그 시선을 다시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든 책이었다.

책을 읽기 전의 나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늘 조금 냉정했다.
‘이 정도는 해야지.’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
‘그 정도도 못 하면 어떡해.’
이런 말들로 스스로를 다그쳤고
그 다그침을
책임감이나 성실함의 표현이라고 착각했다.

돌이켜 보면
그건 성실함이 아니라
자기를 소모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세운 결과
나는 어느 순간
내 감정을 느끼는 법조차
어설퍼졌다.
슬프고 지칠 때조차
‘이건 그냥 일상적인 스트레스지’ 하고 넘겨버리고
과하게 힘든 날도
그저 ‘조금 피곤한 것뿐’이라며
감정을 축소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속에 진짜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기뻐도 기쁘지 않고
슬퍼도 깊이 슬프지 않고
그저 무표정한 회색 같은 감정만
잔잔하게 깔려 있었던 시기.
그 시기가 오래 지속되면
사람은 스스로를 잃어버린다.

쇼펜하우어의 글을 읽고 난 뒤
나는 그 무표정한 회색의 정체가
‘감정의 소진’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감정은 억누르기도 하지만
과하게 참고 버티는 동안
점점 흐릿해지고
어느 순간엔
정서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 속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다.
그 문장은
처음 읽을 때는 너무 차갑게 느껴졌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그러나 그 고통을 직시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인간답게 된다”
라는 문장을 보고
나는 아주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가 내 감정을 피하고 외면한 시간들이
결국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다는 걸
그제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보지 않으면 없어지는 게 아니라
보지 않을수록
더 깊이 쌓이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배웠다.

어떤 날은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울컥해져
눈물을 참느라 고개를 돌린 적도 있다.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니고
특별히 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속에 오래 눌린 무언가가
작은 틈 사이로 빠져나오듯
조용히 흔들린 것이다.

그 눈물은
고통의 눈물이 아니라
회복의 시작 같은 눈물이었다.
감정을 억눌러 살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그 작은 흔들림만으로도
내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깊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억지로 누르지 않는다.
그 감정은
어떤 이유로든
나에게 들르러 온 손님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손님을 쫓아내지 않고
잠시 머물게 두는 것.
그렇게 마음을 풀어두면
감정은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삶에서 중요한 건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감정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을
자기 안에 만들어두는 일이라는 걸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견디고 버티며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명확한 성취로
어떤 사람은
관계 속에서
또 어떤 사람은
자기만의 고독을 통해
자기 삶을 겨우 유지한다.

쇼펜하우어의 글이
마음에 깊게 파고든 이유는
그가 삶을
심리학처럼 분석하거나
자기계발서처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인정해주기 때문이었다.

그 인정은
차가운 문장 속에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따뜻하다.
‘아, 이래서 괴로운 거였구나.’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이런 깨달음이
삶을 조금 덜 외롭게 만든다.

어느 날 밤
불을 끄고 누웠는데
띵 하게 조용한 마음이 들었다.
그 조용함은
여유나 행복의 느낌이 아니라
무너짐의 끝에서 찾아오는
묘한 평온 같은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내가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조금씩 자리를 찾아나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감정이 정돈되면
삶을 바라보는 눈도 정돈된다.
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예전처럼 모든 것이 나를 향해 오지 않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다가온다.
그 차이가
삶의 피로를 아주 많이 덜어준다.

나는 이 책이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직설적이고
너무 냉정하고
너무 현실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마흔 즈음의 누군가,
삶에서 자신의 한계를 정확히 느껴본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이 책의 문장이
이상하리만큼 깊게 박힌다.

나는 그 박힘을
어둠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더 명확해지는
어떤 빛처럼 느꼈다.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예전보다 ‘나이’라는 것에 대해 덜 민감해졌다.
마흔이라는 숫자는
예전엔 마치 어떤 기준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이루었어야 하고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하고
성숙해야 한다는 압박 같은 것.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그 기준들이
대부분 나 스스로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이는 내가 겪어온 시간의 총합일 뿐
그 자체가 성취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고
결정도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더 지혜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더 여유로워지는 것도 아니고
더 단단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시간 속을 지나며
조금씩 쌓인 감정들이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단순한 진실이
왜 그동안 그렇게 어려웠을까.
어쩌면
나는 내 삶의 속도가 느린 이유를
나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억지로 설명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속도의 차이는
나이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 때문에 생긴다는 걸.

어느 날 퇴근 후
반쯤 어두운 집에 들어왔을 때
낯선 고요가 집 안에 있었다.
옛날 같으면
그 고요함이 허무하게 느껴졌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평온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요구하지 않는
그 조용한 공간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내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삶에서 중요한 건
누가 나를 인정하는지보다
내가 나에게 얼마나 정직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직하다는 건
잘못이나 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를 꾸미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의 나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 가까웠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진실들이
결국은 이렇게 이어졌다.
관계의 고통도
삶의 결핍도
욕망의 반복도
모두 인간이라는 존재가
스스로를 향해 갖게 되는
가장 깊은 진실이었다.

한 번은 주말 아침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시간은 꼭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드는 시간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커피 향조차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지금 이런 순간이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원했던 감정이었구나.”

그 감정은 행복이라기보다
안정에 가까웠다.
괜찮아지는 느낌,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
그리고 더 이상
내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느낌.
그 작은 안정이
삶 전체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책 속에
“큰 기쁨보다 작은 고요가 더 오래간다”
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오래 손을 멈췄다.
내 삶은 지나치게 ‘큰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려고만 했던 시절이 길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를 살게 해준 건
크고 대단한 순간이 아니라
밤에 혼자 걷던 골목의 공기,
퇴근 후 씻고 누웠을 때의 미세한 안도감,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들어올 때의 따뜻함 같은
아무도 모르는 작은 고요들이었다.

그 고요를 느끼는 감각이
이 책을 읽고 난 뒤
조금 더 예민해졌다.
예민해졌다는 건
감정적으로 흔들린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 결을 더 잘 느끼게 되었다는 의미였다.
감정의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내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버려야 하며
어떤 것에 마음이 닿는지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요즘 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성장이나 성공보다
‘내 마음이 고요한 상태’를
더 중요한 척도로 삼고 있다.
감정이 잠잠하고
혼란이 줄어들고
내면이 갈피를 잡아가는 그 상태.
그게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에
가장 가깝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이 깨달음이
인생을 완전히 바꾸지는 않는다.
그저
내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
그 방향이 조금 명확해진 것뿐이다.
방향이 명확해지면
속도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보다 빨리 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나에게 정직한 속도로 걸어가는 것,
그게 지금의 나에게는
가장 큰 의미가 되었다.

어떤 저녁
불을 끄고 누워 눈을 감았는데
내 마음이 예전처럼
앞으로 튀어나가지도 않고
뒤로 끌려가지도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아, 이게 균형이구나” 하는
묘한 감정이 지나갔다.
삶의 문제도
감정의 소용돌이도
한순간 해결되진 않지만
지금 이 상태로도
나는 살아갈 수 있다는 감정.
그 감정이
오히려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미숙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미숙함을
예전처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한 가지 변화만으로도
삶이 훨씬 더 숨 쉴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난 뒤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보다
삶을 ‘기억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힘들었던 순간이 오면
그 힘듦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한 시기의 고통이
마치 삶 전체를 덮어버리는 것처럼
마음이 쉽게 물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 안에 작은 빛 하나쯤은
반드시 들어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믿게 되었다.
그 빛은 큰 게 아니다.
사람들의 말처럼
삶을 뒤집어놓는 희망도 아니고
갑자기 모든 걸 해결해주는 기적도 아니다.
그저 아주 작고 조용한 감각,
“그래도 나는 하루를 지나가고 있다”
라는 마음의 움직임 정도였다.

그 작은 움직임이
예전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늘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가치 있는 하루라고 여겼고
실패하면 그날은
아무 의미도 없는 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의미 없는 날이란 없다는 걸
조금씩 깨닫고 있다.
조용한 하루도,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하루도,
그냥 흘러간 하루도
모두 내 삶의 일부라는 것을.

마흔 즈음의 삶은
이런 감정들이 천천히 쌓여
하나의 결을 이루는 시기 같다.
누군가는 여전히 달리고
누군가는 잠시 멈춰 서고
누군가는 방향을 다시 찾으려 한다.
나는 그 중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책을 읽고 난 뒤
나는 삶이 조금은
‘당황스럽지 않은 곳’이 되기를 바랐다.
불안이 오더라도
그 불안이 나를 삼키지 않게,
슬픔이 찾아와도
그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게,
삶의 속도가 늦어져도
그 속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그 바람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바람이었다.
어쩌면 그동안의 나는
너무 거창한 것들을 바라며 살아온 것 같다.
성공이나 성장, 성취 같은 단어들이
나를 이끄는 힘이라고 믿었지만
돌아보면
그 단어들은 나를 지치게 한 날이 더 많았다.

지금의 나는
성공보다 평온을,
성장보다 이해를,
성취보다 균형을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가치의 변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책을 읽기 전에는 쉽게 오지 않았을 변화였다.

책 속에
“삶의 지혜는 고통의 이해에서 출발한다”
는 문장이 있는데
그 문장을 읽고 나서
나는 처음으로
내 고통을 이해하려 애썼다.
누가 준 고통인지
왜 생긴 고통인지
그 이유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 고통도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이해하면
고통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고통이 나를 흔드는 힘은
확실히 약해진다.
그리고 그 약해짐 속에서
사람은 조금씩
자유를 얻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몇 달이 흐른 지금
나는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변화는
원래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의 결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엔 마음이 날카롭게 흔들렸다면
지금은 더 둥글게 흔들린다.
예전엔 불안이 나를 끌고 다녔다면
지금은 그 불안을
조용히 바라보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조그마한 변화가
오래 지속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 한 권 때문에 인생이 바뀔 수 있을까?
나는 예전에는
그런 말에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책이 인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책이 ‘사람을 조금 바꾸고’
그 사람이
조금 달라진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그 변화는 아주 작지만
결국 그 작은 변화들이
나중에는 커다란 방향을 결정한다.
나 또한 그런 움직임의 첫 단계를
지금 막 밟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이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느낀 건
자기 자신을 향한 태도가 바뀔 때
삶의 풍경도 바뀐다는 단순한 진실이었다.
그 진실은
극적인 방식으로 오지 않았다.
천천히,
조용히,
숨 고르듯 다가왔다.
그리고 그 느림이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

이제 나는
삶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누군가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내 안의 목소리가 무시되지 않도록
조금 더 귀 기울인다.
사람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내 감정을 잃지 않고
조금은 가볍게
그러나 흔들리지 않게
살아가고 싶다.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걸
아주 조심스럽게 보여준 책이다.

그리고 나는
그 가능성을
조금은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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