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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rk Clouds, Deep Mercy-슬픔을 숨기지 않을 때 찾아오는 자비

나는 기도라는 단어를 오래도록 사랑해왔다. 하지만 동시에 기도 앞에서 멈칫하며 주저한 시간도 있었다. 기도는 언제나 나의 숨결처럼 가까이 있었지만, 어떤 계절에는 그것이 너무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특히 깊은 상실이나 혼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 어둠을 지날 때면, 기도는 나에게 잘 닿지 않는 언어처럼 느껴졌다. 마음속에 가득한 질문과 억눌린 울음, 애매하게 남아 있는 상처의 조각들은 쉽게 말로 풀리지 않았다. 그럴 때 나는 기도 앞에서 머뭇거렸고,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그런 시절에 나는 Mark Vroegop의 『Dark Clouds, Deep Mercy』를 읽게 되었다.
책 제목부터 묘한 울림을 주었다.
“어두운 구름, 깊은 자비.”
이 대비는 단순한 시적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신앙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진실이었다.
신앙은 늘 밝고 평탄하지만은 않았고, 오히려 어둠, 상실, 침묵, 기다림, 무너지듯 흩어지는 마음의 조각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길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어둠의 계절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를 정직하게, 그리고 깊은 애정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곧장 느끼게 되었다. 이 책은 ‘회복의 방법’이나 ‘신앙적 처방전’을 말하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lament(탄식)이 무엇인지—그리고 왜 탄식이 신앙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지—천천히 보여주는 책이었다. 탄식은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니었다. 탄식은 도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걸음이었다. 무너진 마음으로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탄식을 신앙의 부족함이나 믿음의 약함으로 오해했던 적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거나 질문하는 일을 마치 신뢰 부족으로 생각했고, 신앙인은 언제나 담대하고 밝아야 한다는 잘못된 기준을 무의식적으로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Dark Clouds, Deep Mercy』는 그 본능적 오해를 조용히 깨뜨렸다. 저자는 탄식이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장 정직한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이 막히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였고, 상처로 흔들리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들고 나아가는 용기의 표현이었다.

책의 첫 장을 읽으며 나는 깊은 침묵 속에 잠시 머물렀다. 저자의 문장은 단단했지만 거칠지 않았고, 감정적이었지만 과장되지 않았다. 누군가 들을 줄 아는 귀로, 상실을 경험한 이들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의 탄식시가 가진 영적 깊이를 오래 묵상해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언어로 글을 쓰고 있었다.

Mark Vroegop은 개인적인 상실을 겪은 사람이다.
그의 경험은 이 책 곳곳에 아주 은은하게 스며 있다.
직설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내세우지 않지만, 문장을 따라 읽다 보면 오래된 상처를 조용히 만지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음을 두드린다. 상실 속에서 탄식을 배웠던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영혼의 떨림이 있었다.

책은 탄식의 구조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다.
turn(돌아섬), complain(호소), ask(간구), trust(신뢰).
이 네 단계는 어떤 매뉴얼이나 공식이 아니라, 삶의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모든 영혼이 자연스럽게 지나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나 역시 어려움의 계절을 지나며 이 네 단계를 명확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 실제로 비슷한 여정을 걸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먼저 ‘turn(돌아섬)’은 탄식의 시작이다.
탄식은 도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하는 움직임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탄식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혼의 궤적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오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신앙적 오해 하나가 해결되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나는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이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에 따르면 탄식은 믿음의 부정이 아니라 믿음의 방향이었다. 애써 기도하지 않으려 하거나, 마음이 아프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거나, 하나님께 무언가 돌려 말하려는 것이 오히려 신앙의 단절일 수 있었다. 반대로 탄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잇는 실질적인 행위였다.

돌아선다는 것은 마음을 다시 하나님께 향하게 한다는 의미였다.
상처로 가득한 마음으로라도 하나님께 눈을 돌리는 것.
그 방향성 자체가 이미 신앙이었다.

두 번째 단계인 ‘complain(호소)’은 탄식의 중심에 있다.
성경 속 시편의 많은 장면에서, 욥기의 절규에서, 예레미야의 눈물 속에서—하나님을 향한 정직한 호소가 있었다.
나는 성경을 오래 읽어왔지만, 사실 이 ‘호소’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호소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호소는 하나님과의 깊은 가까움에서 나온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불평조차 하지 않는다.
상대가 관계의 대상이기 때문에,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우리는 호소한다.

Vroegop은 말한다.
“호소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언어다.”
이 말은 내 마음의 중심에 조용히 들어와 박혔다.
억눌린 감정을 그대로 하나님께 내어놓는 것은,
하나님이 듣고 계신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이해받을 수 있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탄식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여러 번 멈춰 서서
내가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들을 떠올렸다.
내 안에도 말하지 못한 호소가 있었다.
겉으로는 괜찮다고 웃었지만
사실은 마음속에서 조용히 무너져내리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마다 나는 침묵을 선택했지만
그 침묵이 꼭 믿음의 모습을 의미하진 않았다는 것을 이 책이 알려주었다.

탄식은 침묵의 반대편에 있는 진실이었다.
마음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
억눌리는 것이 아니라 표현되는 것—
그것이 탄식이었다.

세 번째 단계인 ‘ask(간구)’는 탄식이 신앙으로 연결되는 지점이다.
탄식은 단지 슬픔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을 구하는 적극적인 요청이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의미였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간구한다.

저자는 간구가 결코 소극적인 신앙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간구는 하나님께 손을 뻗는 행위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간구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향한 의존을 표현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함으로써
하나님의 밝은 빛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네 번째 단계인 ‘trust(신뢰)’는 탄식의 결론이다.
신뢰는 감정의 회복이 완전히 끝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신뢰는 여전히 아픈 마음으로,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이다.
완벽한 희망을 얻은 뒤가 아니라,
아직도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드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자주 눈물이 났다.
이 책의 문장들은 억지로 감정을 자극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담담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담담함이
내 안의 억눌린 진실을 꺼내는 데 더욱 큰 힘이 되었다.
탄식을 설명하는 책이지만
이 책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귀하게 여기고
우리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우리의 절규를 멀리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
그 진실을 이 책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전하고 있었다.


책의 두 번째 장을 읽어 내려갈수록, 나는 탄식이라는 행위가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는 기도’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인간답게 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이해하게 되었다. 탄식은 감정을 드러내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억눌린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깊은 자리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특히 저자는 성경 속 여러 탄식시를 세밀하게 분석하면서, 탄식이 신앙의 변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중심부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편만 보아도 거의 3분의 1이 탄식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억하는 밝고 승리의 시편들보다, 오히려 눈물과 눌림, 절규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시편이 훨씬 많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도 신앙에서 ‘슬픔’과 ‘탄식’을 배제하려고 한다. 그것이 믿음이 부족한 모습이라고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Dark Clouds, Deep Mercy』는 말한다.
“탄식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다. 불신앙의 반대도 아니다.
탄식은 신앙이 깊어지는 과정이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며 감정적으로 뒤흔들렸다.
어쩌면 우리는 슬픔을 신앙의 실패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힘든 일이 있어도 잘 극복해야 하고,
눈물은 약함의 표시이며,
아무리 아파도 끝내는 밝은 결론을 가져와야 한다는 압박이 종종 우리를 지치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 진실을 외면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
성경은 깊은 슬픔조차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예배의 한 형태임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책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은 예레미야애가(Lamentations)의 분석이었다.
저자는 예레미야애가를 단순한 ‘슬픔의 기록’으로 보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께 기대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신앙의 고백으로 읽는다.
예레미야는 도시가 무너지고, 백성이 흩어지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 돌아가 탄식한다.
그의 탄식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쓰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언어였다.

저자는 예레미야애가 3장에서 강조되는 한 구절을 깊게 분석한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않음이니이다.”
이 구절은 폐허 한가운데서 선언된 희망이다.
하나님께서 상황을 즉시 바꿔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선하시고 변치 않으시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묵상하는 동안 나는 한동안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은 신앙이 어둠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가운데에서 빛을 붙드는 능력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탄식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며,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영혼의 고백이었다.

책은 이어서 시편 77편을 분석하는데,
이 부분은 나에게 아주 개인적인 울림을 주었다.
시편 기자는 깊은 절망 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 주의 인자가 영원히 끝났습니까?”
“주님, 나를 잊으셨습니까?”
“주님의 긍휼이 끝난 것입니까?”

이 질문들은 매우 정직했고, 때로는 두려울 만큼 직설적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질문들에서 놀랍게도 믿음의 움직임을 보았다.
왜냐하면 질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찾고 있고, 하나님에게 묻고 있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의심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대화하는 방식일 때도 있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며 큰 위로를 받았다.
의심을 느끼는 순간조차 하나님과 연결된 상태일 수 있다면
신앙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고통 속에서 꺼내는 절규를 받아주신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신앙은 단단해지고,
기도는 깊어지고,
관계는 더 사실적이 된다.

저자는 또한 시편 10편, 시편 13편, 시편 22편 등
성경 속 주요 탄식시의 정서를 반복해서 설명한다.
그 성경 구절들은 대부분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절망 → 호소 → 간구 → 신뢰.
이 흐름은 단순히 반복되는 패턴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의 구조였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성경의 탄식이 얼마나 치유적인 언어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탄식은 영혼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
아직 말로 표현되지 못한 슬픔들을 붙잡아 올리는 과정이었다.
탄식은 하나님께 “보아달라”는 간절한 요청이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이 책은 탄식이 공동체적 예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와 교회는 종종 슬픔과 애도에 대해 충분히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와 감사, 축복과 기쁨을 주제로 한 예배에 익숙하지만
슬픔과 고통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는 다소 서툴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을 지적하며
교회가 더 많은 탄식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탄식은 공동체 안에서 상실을 경험한 이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해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큰 공감을 느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상처받은 이들이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조용히 고통을 견디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자신의 슬픔이 공동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봐
더 깊은 외로움 속에 갇히곤 한다.
하지만 만약 공동체가 탄식의 언어를 회복한다면
그 외로움은 자연스럽게 녹아내릴 것이다.

저자는 탄식이 공동체 안에서
공동의 회복을 만든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질문하는 공동체야말로
가장 깊은 신앙의 힘을 가진 공동체라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승리의 노래보다
탄식의 노래를 더 배워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책은 점점 더 깊이 탄식의 실제적인 구조와
그 과정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설명한다.
저자는 탄식이
우리를 절망에서 빛으로 이동시키는 영적 여정이라고 말한다.
이 여정은 빠르지 않고, 때로는 돌아가며, 종종 아프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하게 만든다.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
마치 내 안의 오래된 상처들이 하나씩 이름을 얻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설명하지 못했던 감정의 무게들이
조금씩 정리되고 있었다.
탄식은 감정을 흩뜨리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과정이었다.

책의 흐름은 여전히 부드럽고 진실하며,
독자의 마음을 억지로 조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천천히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도록 돕는 조용한 안내자 같았다.


책의 중반부로 들어서면서, Mark Vroegop은 탄식이 단지 감정의 배출이나 고통의 선언이 아니라, 영혼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드는 ‘형성적 과정(formative process)’임을 강조한다. 나는 이 표현이 매우 인상 깊었다. 탄식은 한 번의 기도가 아니라 영혼이 재정렬되는 과정이며,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의도적이고, 반복적이며, 점진적이다. 고통이 깊을수록 천천히, 그리고 더욱 조심스럽게 영혼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저자는 기도라는 행위를 “형성(forming)”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단지 하나님께 무언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 자체가 변화되는 것—
이것이 탄식이 가진 중요한 힘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힘든 계절마다 내 기도가 얼마나 조급했는지 떠올렸다.
‘빨리 벗어나고 싶다’, ‘당장 해결되고 싶다’,
마치 기도가 문제를 제거하는 도구처럼 사용되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탄식은 문제를 제거하는 기도가 아니라
문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기도였다.
이 기도는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기도였고,
그 바뀐 방향 안에서 작은 변화들이 영혼의 결을 바꾸기 시작한다.

저자는 설명한다.
“탄식은 영혼을 재형성시키는 은혜의 학교다.”
이 말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탄식은 영혼이 조금씩 다시 숨 쉬도록 돕고,
갈라졌던 내면을 다시 묶어주며,
흩어진 감정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실제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저자는 특히 우리의 ‘기억’을 중요하게 다룬다.
기억은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저장소이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을 반복해서 꺼내 보여주는 창고이기도 하다.
그런데 탄식은 이 기억의 방향을 바꾼다.
절망을 떠올리던 기억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셨던 순간들을 다시 찾아내게 만든다.
상실을 떠올리게 만들던 기억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있었던 흔적을 감지하게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탄식은 고통을 잊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눈으로 하나님을 다시 보는 것이다.”

이 말은 내 지난 시간들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해 주었다.
나는 많은 고통의 순간을 무의식적으로 지워버리려 했고,
그 기억만큼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 외면하곤 했다.
하지만 그 순간들에도 하나님은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탄식이라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
탄식은 도망이 아니라 마주함이었다.
그 마주함 속에서 과거가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책에서 특히 강렬했던 부분은
탄식이 희망으로 나아가는 다리라는 설명이었다.
절망에서 곧바로 희망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탄식이라는 다리를 건너야만 희망이 견고해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직한 슬픔을 지나지 않은 희망은 가볍다.
하지만 탄식을 통과한 희망은 무겁고, 깊고, 오래 간다.”

나는 이 문장을 수십 번 되뇌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내가 가졌던 희망 중 상당수는
슬픔을 충분히 통과하지 않은 ‘얕은 희망’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빠른 위로와 빠른 해결을 원하는 마음에서 나온 희망은
삶의 깊은 고통을 붙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탄식을 통해 오래 머물며, 울며, 질문하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다시 붙들기 시작하면
희망은 비로소 깊어진다.
절망의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만큼 단단해진다.

책은 이 탄식의 여정이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상실을 겪은 가족, 아픔 속에 있는 교회,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탄식은 필수적이다.
저자는 말한다.
“탄식 없는 공동체는 피로한 공동체다.
탄식을 허용하는 공동체는 안전한 공동체다.”

나는 이 부분이 특별히 한국 교회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 사회는 성공과 회복을 강조하는 문화 안에 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역시
고통을 충분히 말하지 못하고
슬픔을 오래 붙들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상실을 숨긴다.
고통을 은밀하게 감당한다.
그러다 영혼이 굳어버린다.

저자는 그 상황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짚어냈다.
공동체가 탄식을 배우지 못하면
아픔이 고립되고
고립이 상처를 더 깊게 만든다.
하지만 공동체가 슬픔을 함께 나누면
상처는 공유되고
아픔은 공동의 예배가 된다.
탄식은 공동체를 치유하는 언어였다.

이제 책은 탄식의 구조를 더 깊이 파고들며
특히 “trust(신뢰)” 단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글은 더욱 조용해지고,
문장들은 아프면서도 부드럽다.
신뢰는 감정의 완치가 아니라,
여전히 눈물이 남아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놓지 않으려는 결정이다.

저자는 신뢰를 이렇게 정의했다.
“신뢰는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방향의 선택이다.”
얼마나 단단한 문장인지 모른다.
우리는 흔히 ‘신뢰’를 감정이 회복된 상태로 오해한다.
아무렇지 않아졌을 때, 고통이 사라졌을 때,
상황이 해결되었을 때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 반대라고 말한다.
감정이 불안정할 때,
눈물이 마르지 않을 때,
사방이 어둡고 답이 보이지 않을 때도
하나님의 성품을 붙드는 것이 진짜 신뢰라고.

나는 이 말에서 큰 자유를 얻었다.
왜냐하면 나는 신뢰가 흔들릴 때마다
내 믿음이 약하다고 자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말한다.
“흔들리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바로 신뢰다.”

신뢰는 완전히 평안해진 상태가 아니다.
신뢰는 불안한 하나님의 손을 붙드는 것이다.
희망이 흔들리는 손으로라도 하나님께 손을 내미는 것이다.

저자는 이 신뢰의 장면을
시편 73편과 131편을 통해 설명한다.
특히 시편 131편의 “젖 뗀 아이처럼”이라는 표현은
탄식 이후의 신뢰가 어떤 감정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모든 문제를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안겨 있는 상태였다.
하나님께 안긴 영혼은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유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이다.

읽는 동안 나는 마음이 점점 고요해지고 있었다.
이 고요함은 빠르게 찾아온 위로가 아니라
천천히 찾아오는 신뢰의 감정이었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고통이 하나님 앞에서 놓일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탄식의 끝은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책은 중반부 이후에 탄식이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지는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탄식은 감정의 순환에서 끝나는 기도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다시 조정하고,
영혼이 더 깊고 실제적인 신뢰로 나아가게 만드는 영적 습관이었다.

저자는 특히 탄식이 “삶의 모든 영역을 다시 하나님과 연결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 표현은 단순히 신학적인 설명을 넘어서
실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탄식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한 형태일 뿐 아니라
삶의 무기력과 절망감을 다시 신앙의 길로 가져오는 회복의 움직임이었다.
탄식하는 영혼은 하나님을 잊지 않으려는 영혼이었고,
하나님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영혼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책을 읽다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망을 경험한 순간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실의 계절,
기도가 막혀버린 듯한 침묵의 기간 속에서도
나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말하지 못하는 채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었다.
그 머묾 자체가 탄식이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깨달았다.

저자는 탄식을 실천하는 아주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그 방법들은 모두 실천적이면서도,
어떤 인위적 감정 조작이나 억지 위로가 아니다.
그는 탄식을 “성경적으로 다시 배우는 것”을 강조한다.

첫 번째 실천은 성경의 탄식시를 천천히 따라 말하는 것이다.
시편의 많은 고백들은 정직하고 날것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 감정들은 우리가 평소 기도에서 쉽게 사용할 수 없는 표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편 속 탄식시는 우리의 말을 대신해주는 기도문이었다.
우리가 감정을 말로 옮기지 못할 때,
시편은 그 감정을 하나님께 올려 드릴 언어를 제공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시편의 탄식시는 상실을 견디는 영혼의 언어 교과서이다.”
이 말이 얼마나 실제적인지 모른다.
나는 고통의 계절마다 시편 13편, 22편, 42편을 자주 찾곤 했는데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내 영혼이 말 못 할 슬픔을 시편이 대신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책은 독자에게 탄식시를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권한다.
고통을 직접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효과적이다.
탄식의 언어는 영혼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았다.

탄식의 두 번째 실천은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저자는 설명한다.
“감정은 묻어둘수록 썩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가져갈 때 정화된다.”
이 문장은 짧지만 압도적인 진실을 담고 있다.
우리는 감정을 해결할 수 없을 때 자주 묻어둔다.
그 묻어둔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다시 돌아온다.
분노로, 냉소로, 무기력으로, 혹은 신앙의 회의로.

그러나 감정을 하나님 앞에 가져가는 순간
그 감정은 처리될 수 있는 영역으로 옮겨진다.
하나님은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감정은 하나님의 손에 놓일 때 정리되기 시작한다.
탄식은 감정을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였다.

세 번째 실천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탄식의 질문은 하나님을 떠나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질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탄식의 질문은 관계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얼마나 깊은 표현인지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께 묻는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께 기대가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듣고 계시고,
대화할 의지가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탄식의 질문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정말 저를 보고 계십니까?”
“주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이런 질문들로 구성된다.
이 질문들은 때로 신앙적으로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 속 인물들은 이러한 질문을 하나님께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질문할 수 있다.
정직한 질문은 신앙의 약함이 아니라
신앙의 손을 뻗는 행위였다.

네 번째 실천은 과거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는 것이다.
기억은 탄식의 중요한 축이다.
과거의 구원, 회복, 인도하심을 기억하는 일은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저자는 시편 기자들이 자주 사용한 기도 방식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일을 기억합니다.”
기억은 기도를 미래로 이끌어가는 다리였다.

이 대목은 내게 너무도 현실적이었다.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준 순간들은 많았다.
그때는 고통이 아닌, 은혜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힘든 일이 닥치면
우리는 그 흔적을 쉽게 잊는다.
탄식은 그 흔적들을 다시 불러와
현재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로 만들었다.

다섯 번째 실천은 희망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저자는 희망을 “결심된 신뢰”라고 설명한다.
희망은 감정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 발을 내딛는 선택이 희망을 만든다.
이 희망은 슬픔을 가볍게 만들지 않고,
슬픔의 깊이를 덮어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희망은 슬픔을 붙들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희망은 고통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지만
고통을 견딜 의미와 이유를 제공한다.

여기까지 책의 실천적 부분을 따라오면서
나는 탄식이라는 기도가 얼마나 실제적이고 필수적인지
새삼 깊게 깨달았다.
탄식은 삶을 무너뜨리는 감정이 아니라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감정이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탄식의 실천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조용히 설명한다.
탄식은 영혼을 부드럽게 한다.
탄식은 마음의 단단한 껍질을 깨뜨린다.
탄식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게 한다.
탄식을 통해 영혼은 깊어지고
깊어진 영혼은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탄식이 개인의 상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 후, Mark Vroegop은 시선을 조금 더 넓히기 시작한다. 개인의 상처뿐 아니라, 가정, 교회, 사회, 시대 전체가 겪는 고통에 대해 탄식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은 책의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탄식은 언제나 개인의 감정에 머무르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탄식은 공동체의 상처를 꺼내고, 사회의 무너진 정의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비가 이 땅에 새롭게 임하기를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공동체적 탄식’을 강조하면서
성경 속 인물들이 개인의 아픔뿐 아니라
민족 전체의 죄, 사회적 불의, 공동체의 붕괴를 위해
얼마나 자주 울부짖었는지를 조목조목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도시의 멸망을 보며 울었고,
네헤미야는 폐허가 된 성벽을 보며 금식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넘어서 나라 전체의 죄를 위해 탄식했다.
하박국은 정의가 사라진 시대를 바라보며 “어찌하여”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장면들은 모두 탄식이 단지 개인의 감정 처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탄식은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영적 감각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한국 사회의 여러 상처들이 떠올랐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질병과 상실,
갑작스러운 사고 속에서 남겨진 가족들,
불의한 구조 속에서 피해를 당한 이들,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회적 약자들,
부끄럽고 아픈 사건들이 시간을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이 땅의 상흔들.

그 모든 것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침묵을 선택했던가.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누군가가 대신 해주겠지 해서,
혹은 내 삶이 너무 바빠서,
내가 기도한다고 무엇이 바뀌겠냐는 피로 때문에.

하지만 책은 말한다.
“공동체의 상처에 침묵하는 것은
공동체의 아픔을 깊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함께 탄식하는 순간
상처는 공동의 회복이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탄식은 공동체가 아픔을 함께 지는 방식이었다.
어떤 슬픔은 혼자 감당할 수 없고,
어떤 상실은 공동체가 함께 울어야 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슬픔의 공동체’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그것은 절망적 의미의 공동체가 아니라
슬픔조차 혼자가 아닌 공동체,
아픔이 고립되지 않는 공동체,
눈물이 외롭게 방치되지 않는 공동체였다.

저자는 말한다.
“교회는 희망을 선포하는 공동체이기 전에
정직하게 탄식할 줄 아는 공동체여야 한다.”

나는 이 말이 너무나 필요한 말이라고 느꼈다.
희망을 말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너무 빠른 희망은 상처 난 영혼에게
때때로 부담이 된다.
진짜 희망을 기대하기 위해선
먼저 충분한 눈물이 필요하다.
부정하지 않는 슬픔이 필요하고,
숨기지 않는 탄식이 필요하다.

책은 이어서 탄식이 공동체의 ‘연결’을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탄식은 고통을 공유하고,
슬픔을 함께 느끼며,
말하지 못한 아픔을 들을 줄 아는 공동체를 만든다.
저자는 공동체가 함께 우는 경험이
얼마나 강력한 영적 변화를 만드는지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누군가의 상실 앞에서 조용히 함께 앉아주고
말없이 손을 잡아주는 행동,
함께 울고 함께 기도하며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들이
공동체를 가장 깊게 묶어준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탄식하는 공동체’와 ‘탄식하지 않는 공동체’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떠올렸다.
탄식이 없는 공동체는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지만
내면은 점점 굳어지고, 서로의 고통을 보지 못한다.
힘든 일이 생겨도 누구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슬픔이 공동체 안에서 떠돌며 외로움이 쌓인다.

반대로 탄식을 허용하는 공동체는
약함이 허용되고,
질문이 허용되고,
상처가 숨겨지지 않는다.
그런 공동체에서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난다.

저자는 ‘공동체적 회복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탄식 → 공감 → 기도 → 기다림 → 자비의 경험.
이 과정은 상당히 현실적이고
우리의 신앙과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흐름이었다.

책의 후반부로 들어갈수록
저자는 탄식을 넘어 자비(mercy)라는 주제로 글을 확장한다.
이 책의 원래 부제는 ‘탄식을 통한 자비의 발견’에 가깝다.
탄식은 목표가 아니었다.
탄식을 통해 도달하려는 지점이 있었다.
바로 하나님의 자비였다.

저자는 자비를 이렇게 정의한다.
“자비란 하나님께서 어둠의 계절을 통과한 영혼에게
빛을 다시 보게 하시는 은혜이다.”

이 표현은 너무 단순해 보이지만,
고통을 지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깊이를 담고 있었다.
자비는 문제 해결이 아니다.
자비는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시선이 바뀌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하신다고 말한다.
고통 그 자체가 좋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고통 속에서도
사람을 깊이 있게 빚어 가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고통은 우리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그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신뢰와 새로운 사랑, 새로운 소망을 심으신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면서
내가 지나온 여러 어두운 계절들이 떠올랐다.
그 계절들 속에서 나는 종종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느꼈고
하나님이 침묵한다고 오해했다.
그 침묵은 포기처럼 느껴졌고
기도는 벽에 부딪히는 소리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 돌아볼 때
그때 내가 무너져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붙들고 계셨다.

책은 말한다.
“하나님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자비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이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였다.
탄식은 침묵을 지나 다시 자비를 발견하는 여정이었다.
그리고 자비는 늘 깊었다.
얕은 위로가 아니라
영혼의 깊은 곳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자비였다.

책의 결론으로 향할수록
저자는 하나님의 자비를 ‘어둠의 구름 뒤에 숨어 있는 빛’이라고 묘사한다.
그 빛은 서두르지 않고,
빠르게 나타나지 않으며,
종종 우리를 기다리게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를 찾아온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Mark Vroegop은 이제 탄식을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나 감정의 언어로 다루는 것을 넘어서, 실제 일상에서 어떻게 ‘배워갈 수 있는지’, 즉 탄식의 훈련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은 책 전체에서 가장 실천적이며 동시에 가장 묵상적인 장면이었다.
탄식이 단지 이론이나 감정적 표현이 아니라,
기도의 한 방식이자 영혼의 근육을 단련하는 습관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저자는 우리가 ‘탄식’을 자연스럽게 하지 못하는 이유를 매우 정확하게 짚는다.
우리는 고통을 회피하려는 문화 속에 살고 있고,
감정을 숨기거나 빠르게 해결하려는 경향 속에 살아왔으며,
신앙을 ‘밝음’과 ‘승리’의 언어로만 이해하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슬픔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언어,
하나님께 정직하게 질문하고 울부짖는 언어가
우리에게는 낯설고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저자는 그렇게 말한다.
“탄식은 배우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다면, 더더욱 배워야 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생각이 깊어졌다.
탄식은 감정적 본능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영적 언어였고
그 언어는 연습을 통해 더 깊어진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지만
조금씩 입을 떼어 하나님께 질문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영혼의 깊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

저자가 제안하는 탄식 훈련은 크게 네 가지이다.

첫 번째는 길고 천천히 기도하는 연습이다.
탄식은 짧은 기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짧은 기도는 감정을 다루기 전에 끝나버린다.
탄식은 마음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견디는 훈련이 필요하다.

나는 이 부분이 특히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짧게 기도하면 감정이 표면만 스치고 지나가지만
시간을 두고 가만히 머물면
내 안에서 숨겨져 있던 감정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그 감정들을 다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이 탄식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탄식은 마음의 깊이까지 천천히 내려가는 기도이다.”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깊이에 도달할 수 없다.
짧고 경쾌한 기도는 때로는 신앙의 활력을 주지만
상처 난 마음을 치유하기에는 부족하다.
탄식의 기도는 긴 시간 동안 조용히 머무르며
하나님 앞에 무너진 마음을 천천히 드러내야 한다.

두 번째 훈련은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연습이다.
이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가장 어려운 연습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감정을 말하는 데 서투르기 때문이다.
특히 신앙 안에서는
슬픔이나 분노나 두려움을 말하는 것이
믿음 없는 모습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말로 표현될 때 하나님께 올려진다.”
말하지 않은 감정은 여전히 내부에 남아 있고
그 감정은 처리되지 않은 채로 우리를 무겁게 만든다.
하지만 감정을 말로 꺼내는 순간
그 감정은 하나님께 전달된다.
탄식의 언어는 감정을 하나님 앞으로 옮겨놓는 언어였다.

저자가 권하는 방식은 아주 구체적이다.
하루에 10분이라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종이에 쓰고
그 종이를 기도의 언어로 바꾸어
하나님께 읽어드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할 수 있지만
이 과정은 신앙의 깊은 성찰을 만들어간다.
감정이 정리되면, 기도도 정리되고
기도가 정리되면, 마음도 정리된다.

세 번째 훈련은 성경적 질문을 따라 기도하는 것이다.
성경 속 인물들은 탄식할 때 공통적으로 어떤 질문들을 사용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주님, 왜 침묵하십니까?”
“주님, 제 기도를 듣고 계십니까?”
이 질문들은 감정적처럼 보이지만
사실 신앙의 깊은 자리에서 나온 질문들이다.

저자는 설명한다.
“질문은 하나님과의 연결이다.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께 기대가 있다는 뜻이다.”

이 설명은 내 신앙의 여러 오해를 풀어 주었다.
나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질문은 신앙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깊게 만드는 행위였다.
질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언어였고
그 언어는 탄식의 중요한 요소였다.

네 번째 훈련은 자비를 기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탄식의 끝은 언제나 자비다.
그러나 그 자비는 빠르지 않다.
하나님의 자비는 서두르지 않고
우리 안에서 천천히 뿌리를 내린다.
저자는 자비를 “기다림의 열매”라고 표현한다.
기다림은 불편하고, 고통스럽고, 불확실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희망의 근육이 생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오래 기다리며 기도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지쳐 있었지만
돌아보면 그 기간이
내 신앙을 가장 깊게 만들었던 시기였다.
자비는 기다림의 끝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과정 속에서 하나씩 드러났다.

책을 읽어갈수록
탄식은 단지 고통을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하는 영적 호흡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탄식은 영혼을 조용히 정직하게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숨기고 있던 감정들을 드러내게 하고,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만든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탄식을 배우는 사람들이
결국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단순히 감정의 회복이 아니다.
탄식을 통해 얻는 가장 큰 열매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다.

탄식은 하나님을 멀어지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기도였다.
탄식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깊어지고
신뢰는 더 단단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더 넓어진다.

그리고 탄식이 우리를 데려가는 마지막 지점,
그것이 바로 책의 제목이자 이 책의 핵심 메시지인
깊은 자비(Deep Mercy)이다.


책의 후반부를 읽어 내려갈수록, 나는 ‘Deep Mercy’라는 단어가 점점 더 크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신학적 표현처럼 보였지만,
책 전체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이 단어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알게 되었다.
저자가 말하는 자비는 얕은 위로나 정서적 위안의 수준이 아니라,
삶과 신앙을 근본적으로 다시 세우는 은혜였다.
상처의 자리에만 스며드는 은혜가 아니라,
상처를 통해 영혼을 더 단단하게 빚어가는 은혜였다.
이 자비는 고통을 지우지 않고,
고통을 통과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저자는 말한다.
“탄식은 우리를 깊은 자비로 이끄는 통로다.”

고통이 자비로 변하는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더군다나 빠르지도 않다.
그 과정에는 눈물이 있고
긴 기다림이 있고
설명되지 않는 침묵의 시간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들,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들,
심지어 하나님께 솔직히 항의하는 순간들까지도
하나님은 모두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를 깊은 자비로 끌어당기신다.

저자는 이 자비를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의 성품에서 오는 자비.
둘째,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자비.
셋째, 관계 속에서 흘러가는 자비.

이 세 가지 차원은 서로 맞물려 있으며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먼저, 하나님의 성품에서 오는 자비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드럽게 다루시는 분이시다.
우리를 벌하기 위해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상한 마음을 싸매고 일으키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비를
“아침마다 새롭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은 단순한 시적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인 신앙의 현실이었다.
하나님은 매일 아침
우리에게 새 은혜를 주시는 분이셨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자비보다 하나님의 침묵을 먼저 느낀다.
상처가 깊을수록,
기도가 멈춰 있는 것처럼 느껴질수록,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느낄수록
그 어둠이 더 짙게 드리워진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하나님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도 자비를 준비하고 계신다.”

이 말은 내가 고통의 시기를 지나며
나중에야 깨달았던 진실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하나님의 자비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상처를 그대로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가 의미 없이 흩어지지 않도록
그 속에서 나를 붙드는 손길로 남아 있었다.

두 번째로, 고통을 통해 드러나는 자비
이 책의 가장 놀라운 통찰 중 하나다.
우리는 고통이 없이도 신앙이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된다.
고통은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들고,
하나님을 새로운 방식으로 알게 만든다.

저자는 탄식의 기도 안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영혼이
어떻게 자비를 다시 발견하는지를 세밀하게 설명한다.
그 과정은 마치 어둠 속에서 눈이 천천히 빛에 적응되듯,
고통의 자리에서 영혼이 천천히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다.
고통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다는 진실이 다시 마음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희망이 자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한동안 조용히 숨을 고르며 앉아 있었다.
내 삶의 고통 또한
자비로 흐르는 강의 일부였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고통이 없었다면 나는 하나님을 이렇게 알지 못했을 것이고,
그 상실이 없었다면 나는 이만큼 깊이 기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통은 자비를 파괴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비를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세 번째로, 관계 속에서 흘러가는 자비
책에서 가장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다루는 내용이다.
자비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자비가 사람에게 흘러가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탄식은 개인의 기도로 시작하지만
자비는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저자는 설명한다.
“탄식하는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 된다.”
이 문장은 나를 깊이 흔들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진심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실을 겪은 사람만이
상실의 무게를 알고
그 무게를 가볍게 만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함께 들어줄 수 있다.
탄식은 사람을 차갑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드럽게 만든다.
고통을 통해 마음이 열리고
자비가 그 마음을 통과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내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다.
고통을 지나 자신의 마음이 깨어진 사람들,
그 경험으로 인해 남에게 훨씬 더 깊게 다가갈 수 있게 된 사람들.
그들의 언어는 조용했고
그들의 위로는 과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자비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들의 탄식은 자비의 통로가 되었다.

이 책은 깊은 자비를 ‘흐름’으로 설명한다.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자비가
탄식하는 영혼을 지나
다른 이들에게 흐르고
다시 공동체 전체를 치유하는 흐름.
이 흐름이 반복될 때
하나님의 자비는 개인의 회복을 넘어
공동체의 회복으로 이어진다.

책의 가장 감동적인 대목 중 하나는
저자가 자신의 개인적 상실 이후
어떻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이들의 상실을 더 깊이 바라보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아픔이
다른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게 하는 창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은 억지 주장이나 신학적 설명이 아니라
삶에서 얻어진 성찰이었다.

자비는 그렇게 흘러간다.
아픔을 지나 온 사람 안에서
천천히,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이 메시지가 한국 독자에게 유난히 더 깊게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눈부실 만큼 빠르고 효율적이고 경쟁적인 구조 속에서 움직여 왔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슬픔을 드러내는 일’은
때때로 약함처럼 보이고
감정의 솔직한 표현은
부담을 주는 것처럼 여겨져 왔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믿으면 괜찮아”
“기도하면 금방 회복돼”
“믿음으로 버텨야지”
라는 말들이 너무 쉽게 오간다.

하지만 이 말들 속에
슬픔을 충분히 느끼고 표현할 공간은
종종 사라져 있었다.
책은 이런 문화적 환경 속에서
탄식이라는 언어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닫게 만든다.

한국인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특히 고통이나 상실에 대한 감정은
조금 더 깊숙이 숨겨두고
겉으로는 괜찮은 척,
버티고 있는 척 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슬픔이 치유되기 전에 눌려버리고
어떤 감정은 너무 오래 묻혀서
더 이상 말로 꺼낼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상처는 남아 있고
그 상처는 다시 관계를 아프게 하고
결국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든다.

저자는 탄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감정이 숨겨지지 않고,
고통이 말해지고,
상처가 하나님께 드러나는 순간
치유의 여정이 시작된다.”

이 말은 한국 독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한국인의 정서 구조에서는
고통을 ‘빨리 극복’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하고
슬픔을 오래 표현하는 것은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책은 정반대의 길을 말한다.
슬픔을 충분히 느끼고
그 감정을 하나님께 솔직하게 올려드리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한국 교회의 문화도 비슷한 점이 있다.
한국 교회는 오랫동안
‘승리’, ‘축복’, ‘헌신’, ‘부흥’, ‘회복’이라는 밝은 언어를 강조해 왔다.
물론 이 메시지들은 중요하지만
문제는 밝음의 언어가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슬픔, 상실, 우울, 좌절, 질문의 언어가
교회 안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는 점이다.

이 책이 한국 교회에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탄식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탄식은 하나님께 돌이켜 간다는 뜻이고
하나님이 여전히 응답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질문하고 울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교회는 탄식의 언어를 회복해야 한다.”

탄식은 공동체를 깊게 만들고
신앙을 정직하게 만들며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더 가까이 엮어준다.
탄식이라는 언어가 사라지는 순간
공동체는 감정적으로 더욱 피곤해지고
겉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속에서는 서서히 메말라간다.
탄식 없는 신앙은 깊이를 잃고
탄식 없는 공동체는 따뜻함을 잃는다.

한국 사회에서도
탄식의 언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국의 직장 문화, 가정 문화, 교육 문화는
감정을 괄호 안에 넣고
늘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종종 번아웃을 겪고
감정이 단단히 굳어버리고
마음은 점점 무겁고 피로해진다.

이 책은 그런 한국인에게
정직한 감정, 느린 기도, 깊은 슬픔의 자리를
다시 허락해 준다.
울어도 괜찮다고,
슬퍼도 괜찮다고,
하나님께 질문해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성숙이라고 알려준다.
이 메시지는 한국인에게
치유의 문을 열어주는 언어라고 느꼈다.

또한 한국인은 관계 중심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상처 또한 관계 속에서 가장 많이 생긴다.
가족, 직장, 교회, 친구,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관계로 얽혀 있으며
그 관계 속에서 깊은 슬픔도 함께 생겨난다.
이 책은 관계적 상처를 회피하거나
억누르지 말고
탄식의 언어를 통해 하나님께 올려드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를 경험하라고 말한다.

한국인은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정작 관계 속에서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약하다.
그러다 보니
상처가 대화되지 못한 채
후회나 오해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 상처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탄식하고
자비를 다시 경험하며
관계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의 메시지가 한국 독자에게 의미 있는 마지막 이유는
한국 사회가 지나온 수많은 집단적 상처들 때문이다.
재난, 사고, 사회적 불의, 경제적 불평등,
이 모든 사건들은 한 개인의 상처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깊은 탄식을 요구하는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상처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채
다음 사건으로 떠밀리듯 살아왔다.
애도의 부재는 공동체의 슬픔을 더욱 깊게 만들고
사람들은 점점 더 무력해지고 피로해졌다.

이 책은 그런 한국 사회 전체가
잃어버린 애도의 자리,
탄식의 자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슬픔을 억누르지 않고
그 슬픔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그 기도 안에서 공동체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이 메시지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도
반드시 회복해야 할 중요한 영적 주제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속에서 어떤 작은 움직임들이 시작된다.
그 움직임은 거창하거나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아주 느리고 조용하게 시작되지만
삶 전체의 시선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자비가
결국 ‘삶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은혜’라는 것을
책장을 덮은 뒤에야 비로소 더 선명하게 느꼈다.

가장 먼저 바뀌는 것은 슬픔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전의 나는 슬픔을 가능한 빨리 극복해야 하는 감정으로 여겼다.
삶의 속도가 빠르고
해야 할 일이 많고
사람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내 속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을 빠르게 눌러놓는 데 익숙했다.
그러나 책은 그런 나에게 정반대의 길을 가르쳐주었다.
슬픔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추고
그 슬픔을 바라보고
그 감정을 하나님께 들려드리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깨달음은 나의 일상적인 감정 처리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예전에는 감정이 밀려올 때
“괜찮아, 금방 나아지겠지”
“이 정도는 그냥 넘길 수 있어”
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슬픔이 어디에서 오는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지
조용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하나님께 작은 기도처럼 올려드리는 습관이 생겼다.
이 과정은 놀라울 만큼 마음을 부드럽게 한다.
감정이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게 놓일 때
그 감정은 더 이상 두렵지 않은 것이 된다.

두 번째로 바뀌는 것은 기도의 방식이다.
이 책을 읽기 전의 기도는
대체로 요청 중심의 기도였다.
“하나님, 이것을 해결해주세요.”
“하나님,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께 바라는 것들이 많았고
그 바람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응답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탄식을 배우고 나서
기도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깊어졌다.
지금의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을 ‘해달라’고 요청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드러내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하나님께 더 정직하게 말하게 되었다.
두려움, 피로, 서운함, 혼란, 외로움…
이전에는 감히 기도 안에 담지 못했던 감정들이
이제는 기도의 중심이 되었다.
이 정직함이
응답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기도는 점점 덜 조급해지고
더 깊어지고
더 상냥해졌다.
기도가 하나의 대화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세 번째 변화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나타났다.
사람을 판단하거나
상대의 말 뒤에 숨어 있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관계 속에서 나만의 상처에 갇힐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고통을 통과한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복잡한지를 다시 배웠다.
사람의 말과 행동 뒤에는
말로 하지 못한 감정이 있다는 것,
그 감정은 종종 오해를 만들고
그 오해 속에서 관계는 멀어진다는 것,
이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예민하거나
갑자기 차갑게 변하거나
기대를 저버리는 행동을 보일 때
그 사람의 내면에서
어떤 슬픔이 움직이고 있을지
조금 더 조용히 생각하게 되었다.
비판보다 이해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고
충고보다 경청이 자연스럽게 앞서기 시작했다.
탄식을 배운 사람은
다른 이의 탄식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변화는 인간관계를 훨씬 더 부드럽고 깊게 만든다.

네 번째 변화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시선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에게 가장 엄격하고
자신의 감정에는 가장 둔감하다.
나는 늘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아왔다.
“왜 이 정도도 못 버티지?”
“내가 약해졌나?”
“다들 이 정도는 견디고 사는데…”
이런 말들이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하지만 이 책은
자기 자신에게도 자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상처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를 받는 과정이라는 것,
상처를 설명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속도를 조금 더 천천히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고통이 오면
그 고통을 빨리 덮고 지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을 잠시 보고
그 감정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그 자리에서 자비를 기다리는 마음이 생겼다.
이 느려진 시선이
삶 전체를 훨씬 덜 조급하게 만들었다.

다섯 번째 변화는 희망에 대한 이해에서 온다.
이 책을 읽기 전
희망은 상황이 좋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가 풀리고
길이 열리고
상황이 개선되는 것.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희망은
전혀 다른 차원에 있었다.
희망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조금 더 분명하게 느끼는 마음이었다.
이 희망은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다.
희망은 상황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탄식의 과정 속에 숨어 있다.
고통이 끝날 때 희망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순간
희망은 이미 시작되어 있다.

이 깨달음은
삶을 훨씬 덜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래가 불확실해도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 이유가 이제 더 선명해졌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다시 세운다.
탄식은 하나님께 묻는 기도이지만
하나님을 떠나는 기도가 아니다.
탄식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기도이다.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을 여전히 믿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믿음은 의심 속에서도 자란다는 것을
책은 조용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하나님께 ‘대답’을 기대하는 마음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하나님은 슬픔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기 전에
슬픔 속에서 우리 곁에 머무르시는 분이다.
이 신뢰가 마음을 다시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이
기도를 깊게 만들고
사람을 이해하게 만들고
삶의 속도를 천천히 조절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마음 한쪽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데 분명히 존재하는 울림 같은 것이었다.
책을 다 읽었는데도 끝이 아니라
어떤 여정의 시작에 더 가까운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탄식이라는 언어를 처음 제대로 배운 날처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울리는 질문들이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슬픔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하나님의 자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내면의 물음들이 조용히 떠올랐다.

이 책은 슬픔을 해결해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슬픔을 정직하게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빠르게 잊고 지나가려는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그 감정이 완전히 말해지고
하나님께 드러나고
그 자리에서 다시 숨을 고를 수 있게 도와주는 책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이 메시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날은 기도할 힘이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흐릿해질 때가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날에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온다.
탄식이라는 기도는 잘할 필요가 없고
정돈되어 있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하나님께 천천히 올려놓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슬픔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새롭게 배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몰아붙이지 않으시고
서둘러 회복시키려 하지 않으시며
감정을 재촉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가진 속도를 잘 아시는 분이다.
조급함 대신 기다림으로,
침묵 대신 자비로,
어둠 대신 천천히 자라나는 희망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다.
그 은혜를 천천히 느끼는 동안
나는 자비라는 것이
감정을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감정을 하나하나 받아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책 속에서 반복되는 메시지는 결국 단순한 것 같지만
삶으로 옮기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슬픔을 숨기지 않는 용기,
기다림을 감당하는 인내,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는 정직함,
그리고 자비를 발견할 수 있는 열린 마음.
이것들은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지만
탄식이라는 기도 안에서 조금씩 가능해진다.
탄식은 우리를 부드럽게 만들고
그 부드러움 속에서 하나님이 만지시는 자리를 남긴다.
그 자리가 회복의 시작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하는 믿음’이 아니라
‘정직한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신앙은 강해지려고 애쓰는 과정이 아니었다.
약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낼 때
하나님이 오히려 더 깊이 다가오시는 관계였다.
그래서 탄식은 실패가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기도이며
가장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진실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이후
앞으로의 고통이 사라질 거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고통이 올 때
하나님께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그 순간 어떤 기도로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지,
그 다음 어떤 자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삶의 무게를 견디는 방식은 완전히 달라진다.
고통이 무너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하는 하나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면
마음속에서 한 줄의 고백처럼
잔잔하게 떠오르는 문장이 있다.
슬픔을 억누르지 말고
하나님께 천천히 드러내도 된다는 것.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자리에서 자비가 자란다는 것.
우리가 깊은 어둠 속을 걸을 때조차
그 어둠이 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그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비의 빛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
이 진실이 내 마음속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그 빛은 서두르지 않지만
결국 반드시 우리에게 도달한다.
그 사실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큰 위로이자
앞으로의 삶을 이끄는 조용한 희망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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