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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ountain Is You – 내 안의 산을 이해하는 순간, 삶은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책을 펼치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건
브리아나 위스트의 문장이 엉뚱하게 날카롭다는 것이었다.
부드럽게 시작하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내 마음의 가장 깊은 틈을 정확히 찌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부터
내 안에도 ‘산’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산이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
어떤 감정의 모양으로 나를 막고 있었는지는
잘 몰랐다.

이 책은 그 산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도망치고 싶은 순간,
이유 없이 지치는 날들,
내가 스스로 무너뜨린 것 같은 관계들,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내가 만든 산”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자기 파괴란 “악의적인 행동”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을 버티기 위해
무의식이 선택한 ‘임시방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이상하게도 나를 위로했다.
그 임시방편이 오래 굳어져
장애물이 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나를 망쳤다는 감정보다
이제라도 다시 배울 수 있다는 희미한 확신이 생겼다.

책의 초반부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멈추는 것은 외부가 아니라,
애써 외면해온 우리 내부의 미해결 감정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감정이라는 단어가 너무 흔해서
그게 내 삶을 이렇게 강하게 흔들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생소했다.
하지만 곱씹어 보면
내가 어떤 사람에게 과하게 예민하게 반응한 날,
어떤 선택을 망설이며 뒤로 미뤘던 날,
스스로를 이상하게 몰아붙였던 순간들은
모두 감정이 만든 그림자였다.

그림자를 바라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길고 짙어졌다.

저자는
“감정은 해결되지 않으면 반복된다”고 말한다.
이 반복은
우리가 틀린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감정이 이해받지 못해
끝없이 같은 자리를 맴돌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문득 오래전의 경험이 떠올랐다.
왜인지 모르게 항상 비슷한 관계 패턴이 반복됐던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조금만 거리를 두면
나는 버려질 것 같은 감정에 휩싸였고
그 감정이 두려워
애써 더 다가갔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두려움은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 감정을 인정하고 바라보는 것을
오랫동안 피했던 나 자신 때문이었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말한다.
감정을 회피하는 방식이
결국 ‘자기 파괴’라는 패턴을 만든다고.
그리고 그 패턴을
“내면의 산”이라고 부른다.

이 표현이 내게는 이상하게도 명확하게 다가왔다.
산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오랜 시간 쌓이고 다져지고 굳어져
어느 순간 움직이기 어려운 거대한 형태가 된다.
내 내면의 산도 그랬다.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던 감정들이
조용히 쌓여
어느 순간
나의 가능성과 자유를 가로막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를 멈추게 했던 경험들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저자는 자기 파괴의 대부분이
“자기 보호의 잘못된 방식”에서 시작된다고 설명한다.
그 설명이 너무 정직해서
거부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나를 보호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감정을 회피한 채
스스로를 예전의 패턴 속에 가둬 두고 있었다.

책의 중반부로 들어갈수록
내 내면의 산을 움직이는 일은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감정 하나를 정확히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비로소 산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감정은 어렵다.
하지만 더 어려운 건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애써 만든 행동 패턴을
해체하는 일이다.
저자는 이 과정을
아주 따뜻하지만 가혹한 현실로 설명한다.

그 설명은
책을 읽는 사람에게
내면의 회피 습관과 대면하게 만든다.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었다 다시 펼쳤다.
어떤 문장은
읽는 순간 마음 깊은 곳이 아릿했다.
감정이 나를 막아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은
어쩌면 성장의 가장 어려운 단계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인정은
나를 약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강하게 만들었다.
마치 내 인생에서 오랫동안 무겁게 버텨온 산 하나가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던 것처럼.

저자는 말한다.
“산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녹아내리는 것이다.”
그 말이 참 오래 머물렀다.

내가 끙끙대며 힘으로 끌어내려고 했던 것들이
사실은
천천히 녹여내야 하는 감정의 얼음이었다는 걸
처음으로 이해하게 됐다.

“산을 옮긴다”는 말은
삶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거대한 결단이 아니라
내 감정의 얼음을
따뜻한 이해로 조금씩 녹이는 일이었던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나도 몰랐던 감정들이
하나씩 고개를 내민다.
저자가 말하는 “미해결 감정”이라는 단어가
처음엔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말이
지나치게 구체적인 현실이 되어 다가온다.

나는 그동안
감정을 떠올릴 때면
대부분 ‘현재 감정’을 생각했다.
지금 화가 나는지,
지금 서운한지,
지금 불안한지.
그런데 저자는
감정의 시작은 과거라고 말한다.
현재의 반응 대부분은
과거에서 멈춰 있던 감정의 메아리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몇 년씩 반복되던 내 습관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누군가에게 실망하거나 상처받으면
직접 말하지 않고 잠잠해지는 쪽이었다.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갈등이 두려웠던 거였다.
갈등을 피하는 방식이
잠잠해지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이 잠잠함의 뿌리는
아주 오래전의 기억 속 어딘가에 있었다.

그 기억을 지금 여기서 꺼내는 건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브리아나 위스트는
그 기억을 직면할 수 있도록
글을 아주 조심스럽게 이끈다.
마치 내 옆에 앉아
“천천히 괜찮아, 네가 준비되면 말해도 돼”
라고 말해주는 사람 같았다.

자기 파괴는
우리가 가진 방어기제가
과하게 작동했을 때 나타난다.
저자는 “과한 방어는 결국 공격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나는 이 문장을 한참 붙잡고 있었다.
왜냐면
내가 한참 동안 나를 지키기 위해 선택한 방식이
결국 누군가에게는 벽처럼 느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그 지키는 방식이
나를 더 고립시켰다.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많은 문장들이
가슴을 찌르는 느낌일 것이다.

책이 이야기하는 산은
해결되지 않은 감정,
외면했던 상처,
지나친 자기비판,
불확실성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이 혼합된 형태다.
산은 항상 크지 않다.
대부분의 산은
작은 돌멩이들에서 시작된다.
작은 실망, 작은 거절, 작은 외면, 작은 불안.
그 돌멩이들이 쌓이고 굳어
어느 순간 거대한 산처럼 보이는 것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건
산을 한 번에 옮기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변화를 갈망하지만
변화는 우리를 겁먹게 한다.
그 겁이
산을 더 크게 만든다.

그래서 저자는
“변화는 결심이 아니라 감정의 재구조화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았다.

특히 책에서
‘감정은 우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설명이 인생 전반을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감정을 회피하는 방식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는 사실도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 방식은
그 당시의 나를 보호했기 때문에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보호가 나에게 필요하지 않은 시기가 왔다.
산은 초기엔 쉼터였지만
지금은 길을 막는 덩어리가 된 셈이다.

저자는 감정을 재구조화하는 방법을
여러 장에서 천천히 풀어낸다.
그 과정은 심리치료나 명상 같은 기법보다
훨씬 실질적이고 현실적이다.
예를 들면
“지금 느끼는 감정이
과거의 어떤 상처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정확한 연결을 시도하라”고 말한다.
감정과 과거의 사건이 연결되면
감정의 주도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감정을 해석하는 일을 반복하면
감정은 점점 실제 모습으로 드러나고
그 드러남이
산을 녹이는 열이 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감정이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바꿔온
하나의 힘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감정 때문에 무너진 적도 있었고
감정 때문에 일어난 적도 있었다.
감정이 삶을 망가뜨린 것처럼 보이는 날도 있었지만
사실은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
삶이 더 복잡해졌던 날들이 더 많았다.

저자는 감정을 다루는 법을
너무 부드럽게 설명한다.
“감정은 적이 아니다.
감정은 신호다.”
이 문장은
그날부터 내가 감정을 대하는 태도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감정이 신호라면
그 신호는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려는 걸까.
이 질문은
책의 핵심을 스스로 꺼내보게 한다.
감정이 나에게 주고 싶었던 메시지를 듣는 일.
그 메시지를 듣기 시작할 때
산의 형태가 바뀌기 시작한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나의 산을 떠올렸다.
그 산은
불안이었고
두려움이었고
사라질까 봐 조급해지는 마음이었다.
그 산은
누구를 사랑하거나 사랑받는 일이
자꾸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감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관계는 항상 반복된다.
나는 왜 항상 비슷한 지점에서
사람들과 멀어졌는지
몇 페이지를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됐다.

브리아나 위스트가
자기 파괴의 근원을
‘정체성의 불일치’에서 찾는 부분도 인상 깊었다.
우리가 되고 싶은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
그 간격이 바로 산이 된다.
우리는
그 간격 때문에 불안하고
그 불안 때문에 자기 sabotaging(방해) 행동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 간격을 인정하지 않는다.
간격을 인정하면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간격을
있는 그대로 보라고 말한다.
그 간격을 정확히 봐야
비롯 피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이건 내 얘기인데’라는 감정이 들었다.
아마 많은 독자들도
그럴 것이다.
책은 깊고 복잡한 심리를 다루지만
문장은 어렵지 않다.
굉장히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더 깊은 성찰로 이끈다.
나는 책을 덮기 전까지
계속해서
산의 모양이 조금씩 바뀌는 느낌을 받았다.

감정을 이해하면
산은 움직인다.
정확히 말하면
산은 ‘움직인다기보다 녹아내린다.’
책을 읽어갈수록
그 표현의 의미가 조금씩 더 선명해졌다.


책장을 넘기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많은 어려움이
사실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였다는 것.
감정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하면서
정작 그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저자는 감정을 바라보는 태도 자체를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감정은 ‘반응’이 아니라 ‘정보’라는 설명이었다.
우리가 화가 날 때, 두려울 때, 불안할 때
그 감정은 사건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감정에 끌려다니게 되고
결국 산은 더 커진다.

감정을 피하려는 사람일수록
감정이 삶을 지배한다.
이 문장은 읽는 순간에는 조금 역설적으로 느껴졌지만
돌아보면 너무나 정확했다.
감정을 인정하는 게 두려워서
감정을 억누를수록
그 감정은 더 강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저자는 이걸 “정서적 반동”이라고 표현한다.
피하고 싶은 감정일수록
더 큰 형태로 재출현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삶에서
이 반동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가까운 사람과 갈등이 생기면
나는 대부분 조용히 뒤로 물러나거나
대화를 피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아무 상관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감정이 폭발한 적도 있었다.
그 감정의 크기를 보면서
스스로도 놀랐던 기억이 있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이 감정의 반동이 바로 “산의 흔들림”이라고 말한다.
산이 무너지려 할 때
그 안의 구조가 요동치는 것처럼
감정도 흔들리고 덜컥거린다는 것이다.
감정을 마주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감정이 더 강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저자는 말한다.
그 흔들림은 산이 사라지려는 신호라고.

이 대목을 읽으며
이상하게도 가벼운 숨이 나왔다.
감정을 느끼려고 노력할 때
왜 더 힘들어지는지 늘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감정은 직면의 순간 더 크게 요동친다.
하지만 그 요동은
감정이 나를 떠나려는 과정이다.

책은 감정의 인정을 넘어서
감정을 다루는 아주 실질적인 방법으로 넘어간다.
저자가 말하는 핵심 기술 중 하나는
감정을 “언어화”하는 능력이다.
감정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언어라는 그릇이 필요하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감정의 세기는 감소하고
대신 이해가 깊어진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감정은 더 이상 산이 아니라
길잡이가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나서
종이에 내 감정을 적어보는 습관을 조금씩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어 몇 개로 끝나기도 했고
엉뚱한 문장만 적어 내려가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글로 적는 순간
감정의 형태와 색깔이 선명해졌다.

‘나는 지금 무섭다.’
‘나는 외롭다.’
‘나는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을까 봐 불안하다.’
이런 문장을 적어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감정은 언어에 담기는 순간
흔들림을 멈추고
제 자리를 찾는다.

감정의 언어화가 습관이 되기 시작하면
새로운 변화들이 나타난다.
저자는 이를
정체성 변환의 첫 단계라고 부른다.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
비로소 선택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아주 작지만
삶의 방향을 서서히 바꾼다.

책은 이 흐름을
‘자기 인식 → 자기 정직 → 자기 조절 → 자기 변화’
라는 구조로 설명한다.
이 구조를 하나씩 이해하다 보면
변화라는 단어가 더 이상 막연하지 않다.
저자는 변화가 ‘정신력’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변화는
내 감정과 정체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결과다.

이 부분이 특히 힘이 됐다.
저자는 우리가 변화하지 못하는 이유로
‘정체성의 고착’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붙여놓은 정체성이
때로는 족쇄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라는 말은
겉보기엔 스스로를 보호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견고한 핑계가 된다.

나도 이 핑계를 자주 사용해왔다.
특히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는 원래 여기에 약해”
“나는 원래 걱정을 잘해”
“나는 원래 그런 상황에서 불안해져”
이런 말들은
언뜻 솔직한 표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변화를 시작하지 않기 위해
정체성 뒤에 숨는 것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아주 날카롭게 짚어낸다.
정체성은 태생적 고정값이 아니라
습관화된 감정 반응의 패턴이라는 것이다.
즉,
변화는 ‘새로운 나가 되는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정체성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다.

나는 이 설명이 너무 새로웠다.
정체성이 단단해야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너무 단단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특히 감동받은 부분은
저자가 인간의 두려움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두려움은 ‘피해야 할 감정’이 아니라
‘중요한 변화의 지점’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것이다.
이 설명을 읽고 난 뒤
나는 내가 미뤄왔던 선택들을 돌아보게 됐다.
두려웠다는 이유만으로 피했던 일들.
그 두려움이
변화의 문 앞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됐다.

감정은 두려움을 제공하지만
두려움은 종종 삶을 확장시키는 문턱에 있다.
산은 겁을 주지만
그 산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산은 길이 된다.
책의 단락들 곳곳에서
이 메시지가 반복되는데
이 반복이 단순한 강조가 아니라
점점 더 깊은 각도로 들어가게 만드는 느낌이었다.
저자는 글을 통해
독자가 감정을 바라보는 렌즈를
서서히 바꿔놓는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감정을 적으로 여기지 않는 일이
얼마나 큰 해방감을 주는지 처음 느꼈다.
감정을 숨기지 않으면
감정이 나를 덮치지 못한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감정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 된다.
이해의 대상이 되면
그 감정은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처럼 기능한다.

감정 하나를 이해했을 뿐인데
세상이 덜 무섭게 느껴지는 경험이
정말 기묘하면서도 따뜻했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마침내
‘자기 파괴의 정체’를 이야기한다.
자기 파괴는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지금의 나와 너무 크게 다를 때
그 간극을 감당하지 못해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는
무의식의 방어 행위라고 한다.

이 설명은 너무 정확해서
읽는 순간 머릿속이 쨍했다.
우리는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변화를 무서워한다.
변화한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 거리감을 메우는 과정에서
사람은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한다.
그 행동은 잘못된 게 아니라
‘두려움에 대한 무의식적 대처 방식’이다.

나는 이 부분에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 설명은 너무 깊었고
내 삶의 많은 장면들이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왜 어떤 순간에
스스로를 방해하는 행동을 했는지
왜 노력하면서도 제자리만 맴돌았는지
이제야 선명해졌다.

변화는
의지의 문제라기보다
정체성의 문제라는 것.
정체성이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리 큰 결심도 오래가지 못한다.
정체성의 변환이
변화의 본질이라는 이 통찰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뼈아프고도 깊은 진실이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변한 건
‘감정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이전엔 감정이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반응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저자는 감정을
“나를 구성하는 정보의 집합체”라고 설명한다.
이 설명을 이해하는 순간
감정을 억누르거나 피하려는 태도 자체가
삶을 흐리게 만드는 행동임을
겪어본 적 있는 사람은 바로 알 수 있다.

감정은 반응이 아닌 정보라면
그 정보를 읽지 못하는 건
인생에서 중요한 단서를 놓치는 일이다.
단서가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그 부딪힘이 곧 ‘산’이 되고
그 산은 결국
“나는 왜 항상 이런 식이지?”
라는 자기비난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자기비난이 자기파괴의 가장 조용한 형태라고 말한다.
자기비난은 소리를 내지 않지만
내면을 가장 깊이 무너뜨린다.
자기비난이 반복되면
사람은 결국
“시도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 순간
나는 정말 조용히 스스로를 비난하며 살았던 기억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크게 상처받아서가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일이 반복됐을 때
그 실망의 무게가
나를 점점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저자는 이 패턴을
‘자기 회피의 궁극적 단계’라고 말한다.

자기비난은 변화를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서 생긴다.
그 부담이 너무 크면
사람은 변화보다 정체를 선택한다.
정체는 안전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가장 위험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정체된 감정은
산의 크기를 더 키우기 때문이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이 정체를 뚫는 힘은
‘근본적 정직성’이라고 한다.
근본적 정직성은
타인에게 정직한 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정직한 것이다.
“나는 지금 두렵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이 관계가 무너질까 봐 걱정된다.”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산은 움직인다.

나는 이 정직성의 장면을
내 삶에서 떠올려 보았다.
누군가에게 실망했을 때
사실은 ‘버려질까 봐’ 두려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서
상대에게 무심한 척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게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돌아보면
그 행동은
산의 경사를 조금 더 가파르게 만든 것뿐이었다.

감정을 직면하지 않으면
감정은 뾰족한 형태로 변한다.
그 뾰족함이
나를 찌르고
때로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찔러버린다.
그러고 나서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하는 자책이 시작된다.

이 책이 좋은 이유는
그 자책을 멈추게 한다는 점이다.
자책은 도망이고
정직은 시작이다.
정직은
산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는 첫 걸음이다.

책 후반부에서는
산을 녹이는 세 가지 기본 원칙이 나온다.

첫 번째는
감정과 기억의 연결을 찾는 일.
감정은 언제나 과거와 연결된다.
지금 화가 나는 이유가
지금 사람이 아니라
과거의 상처에 남아 있는 감정 때문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연결을 찾는 순간
감정의 정체가 드러나고
산은 작은 금부터 간다.

두 번째는
감정과 행동의 인과를 확인하는 일이다.
감정이 행동을 만들고
행동이 패턴을 만든다.
패턴은 결국 정체성을 만든다.
이 말은
감정을 다루는 일이 곧
정체성을 다루는 일이라는 뜻이다.
감정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정체성이 변한다.

세 번째는
미래의 나를 상상하고
그 정체성을 미리 초대하는 일이다.
저자는 말한다.
“변화는 의지가 아니라 정체성의 문제다.”
우리는 ‘해야 할 일’로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변한다.

이 세 가지 원칙은
단순해 보이지만
삶에 적용하면
아주 깊은 변화를 만든다.

나도 이 부분을 읽고
미래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떠올리려고 했다.

감정적으로 건강한 사람,
관계에서 미묘한 균열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
두려움 앞에서 멈추지 않는 사람.
그 모습이
지금의 나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저자의 말대로라면
그 모습은 ‘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가능성’이었다.
그 가능성을 불러와
현재의 행동과 연결시키는 것이
산을 움직이는 과정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변화라는 단어의 무게가 처음으로 바뀌었다.
이전까지 변화는
큰 결심, 뜨거운 동기, 과감한 실행을 의미했다.
하지만 저자는
변화가 사실은
감정 하나를 정확히 해석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감정을 정확히 바라보는 일은
군더더기 없는 정직함을 요구한다.
정직하려면
내가 만들어낸 방어기제를 하나씩 내려놓아야 한다.
그 과정은 불편하고
때로는 아프지만
이 불편함이
산이 녹아내리는 순간이다.

그런데 산은
한 번 녹기 시작하면
생각보다 빨리 형태를 잃는다.
감정이 다뤄지기 시작하면
두려움과 불안도
서서히 힘을 잃는다.
애써 붙잡고 있던 고집도
실은 나를 보호하려는 의도였음을 알게 되면
그 고집마저도
부드럽게 풀리기 시작한다.

나는 책에서
자기 회피를 설명하는 방식이 특히 좋았다.
저자는 자기 회피를
‘감정이 아니어야만 하는 감정을 피하려는 마음’이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어
슬퍼해도 되는 상황에서
내가 슬퍼하면
스스로 약해 보인다고 느끼는 사람은
슬픔을 억누른다.
이 억누름은
슬픔을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슬픔은 더 단단한 형태로 굳는다.
그리고 그 굳은 형태가
산이 된다.

여기에서 저자가 던진 말이 있다.
“슬픔은 대단한 감정이 아니다.
그저 흘러가야 하는 감정일 뿐이다.”
나는 이 문장에서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내가 그동안 슬픔을 너무 특별한 감정처럼 취급했기 때문에
슬픔이 더 무거워졌던 것이 아닐까.
감정은 특별한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 흐름을 막으면
감정은 고여서 산이 된다.

이 부분을 읽고
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했다.
감정이 흐르지 않으면
삶도 멈춘다.
흐름이 살아나는 순간
산은 더 이상 산이 아니다.
움직일 수 있는 덩어리로 바뀌고
조금씩 느슨해진다.

저자는
사람이 변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정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정의 갇힘은
생각보다 단순한 패턴에서 시작된다.
단 한 번의 큰 상처가 아니라
여러 번의 작은 감정 억압들이 쌓여서
정체 상태를 만든다.
작은 억압이 반복되면
자기 기만이 생기고
자기 기만이 반복되면
정체성이 왜곡되고
왜곡된 정체성은
더 큰 산을 만든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니
감정을 다루는 일이
삶 전체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라는 걸
좀 더 실감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자꾸 떠올렸다.
감정적 성숙은
나를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게 아니라
나를 ‘정확한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
정확하게 나를 아는 사람은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다.
감정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감정이 나를 조종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산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산을 다르게 보게 된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이 감정적 성숙을
‘자기 관계 회복’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부분의 시간은
타인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관계는
나 자신과의 관계다.
내 감정과 어떻게 대화하는지,
내 욕구를 얼마나 정확히 인지하는지,
내 두려움을 얼마나 진실하게 다루는지.
이 모든 것이
자기 관계의 질을 결정한다.

이 책이 말하는 성장의 본질은
바로 이 자기 관계 회복이다.
자기 관계가 회복되면
삶의 다른 영역들도
스스로 균형을 찾기 시작한다.
일, 관계, 목표, 습관, 자존감까지.
어떤 노력도
내면의 감정을 무시하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

감정과 함께 가는 성장만이
산을 완전히 녹일 수 있다.
나는 이 말이
아주 오래 마음에 남았다.


책의 앞부분에서는 산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면,
중반 이후의 장들은 “그 산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는가”보다는
“산의 존재를 어떻게 재해석해야 하는가”에 가까웠다.
이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던 이유는
문제 해결 중심의 자기계발서에 익숙해진 내 사고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장애물을 두고
극복, 타파, 정복 같은 단어를 쉽게 사용한다.
그런데 브리아나 위스트는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산을 정복하려는 태도 자체가
산을 더 견고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산은 싸워 이길 대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바라봐야 할 대상에 가깝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면서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 동안
나와 싸우느라 지쳐 있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좀처럼 실감하기 어려운 사실이 있다.
스스로와 싸우는 일은
결국 스스로를 잃는 일과 가깝다.
나와 싸우는 순간
내 감정은 숨으려고 하고
나는 더 많은 부분을 통제하려 한다.
이 통제의 과한 시도가
점점 더 큰 불안을 만든다.
불안은 산을 키우고
산은 내 삶의 진행 방향을 막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며
얼마나 종종 내가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나아질 거야”라고 생각했는지 떠올랐다.
하지만 문제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하면
그 다음의 문제가 생겼다.
지금 돌아보면
그 문제들은 형태만 달랐어도
근본적으로는
똑같은 감정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해결해야 할 것은
문제의 종류가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감정 구조였던 것이다.

감정을 해석하지 못하면
문제는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이제야 그 말의 의미가 선명해졌다.

책에서 가장 강렬한 문장 중 하나는
“당신의 인생을 막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감정이다”라는 문장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마치 길을 잃고 걷다가
갑자기 넓은 평지에 도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복잡해 보였던 문제들 뒤에
감정이라는 단일한 요소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기이할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모든 것을 설명하고 있었다.

감정이 해석되지 않으면
사람은 같은 길을 뱅글뱅글 돌게 된다.
그 반복이
때로는 스스로를 탓하게 만들고
그 탓이 쌓이면
자기파괴적 선택이 발생한다.
저자가 말하듯
자기파괴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미해결에서 비롯된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그동안 내 삶에서 반복되던 패턴들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패턴은 이유 없이 생기지 않는다.
패턴은 언제나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대부분 나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그 보호가 오히려 나를 더 약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산을 만들어 낸 감정이
정작 나를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이 패턴을 ‘내면의 충돌’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성장하고 싶으면서
동시에 변화를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아주 오래된 감정에서 비롯되었을 때
사람은 그 사실조차 모른 채
스스로를 가로막게 된다.
이 설명을 읽는 동안
나는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조용히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흔들림은 불편했지만
필요한 흔들림이었다.

책에서는
이 충돌을 해결하는 핵심이
‘정체성의 진화’라고 말한다.
정체성이 바뀌지 않으면
행동도 바뀌지 않는다.
행동이 바뀌지 않으면
감정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세 요소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다.
정체성은 감정을 만들고
감정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다시 정체성을 강화한다.
이 순환을 깨기 위해
저자는 먼저
정체성을 재구성하라고 말한다.

정체성 재구성은
겉보기에는 추상적인 개념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아주 현실적으로 표현한다.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을
미래가 아닌 현재로 불러오라는 것이다.
미래의 나를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 삶을 미리 살아보는 것이다.
그 상상이 아니라
행동에서 시작하라고 한다.
작은 행동 하나라도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필수적이다.

나는 이 설명을 읽고
무척 강한 울림을 느꼈다.
우리는 무언가가 완벽하게 준비된 다음에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정체성은
준비가 아니라 행동에 의해 만들어진다.
미래의 나를 위한 행동을
지금 하기로 결정하는 순간
정체성은 바뀌기 시작한다.

책에서 또 하나 놀라웠던 부분은
정체성과 감정이
단순히 심리적 요소가 아니라
신체적 반응에도 깊게 연결된다는 설명이었다.
감정을 억누르면
호흡이 얕아지고
몸이 경직되며
잠이 온전하지 않게 되고
관계에서도 불필요한 긴장감이 생긴다.
감정의 흐름이 막히면
몸의 흐름도 막힌다.
이 설명은
감정-몸-정체성의 연결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주었다.

산을 움직인다는 건
심리적인 작업만이 아니라
신체적 긴장까지 풀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감정을 다룰 때
몸의 반응을 살피라고 조언한다.
몸이 긴장하는 순간
그 긴장 속에서
감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감정과 몸의 연결을 이해하면
나는 감정을 더 정확히 읽을 수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하루에 한 번쯤
가만히 앉아
몸이 어떻게 느끼는지
조용히 관찰해보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에는 별 느낌이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작은 어깨의 긴장,
숨이 자꾸 위로만 차오르는 느낌,
이유 없이 가슴이 꽉 조여오는 순간들을
조금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몸이 말해주는 감정은
생각보다 정확했다.
감정은 몸의 언어로 먼저 표현된다.

책에서는
자기 회피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감정의 ‘오역’을 이야기한다.
감정을 정확히 번역하지 못하면
그 감정은 잘못된 행동으로 흘러간다.
예를 들어
불안이라는 감정을
“나는 못하는 사람이야”라는 생각으로 번역하면
행동은 멈춤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불안을
“이 상황이 낯설어서 그런 거야”라고 번역하면
행동은 계속될 수 있다.
감정을 오역하지 않는 일,
즉 감정을 제대로 번역하는 능력이
산을 녹이는 중요한 기술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감정 번역이라는 개념이 정말 신선하게 느껴졌다.
감정을 번역한다고 생각하니
감정의 세기가 조금 낮춰지고
나는 감정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힘이 생겼다.
모든 감정은 번역의 여지가 있고
그 번역은 나에게 달려 있다.
저자는 감정 번역이 곧
정체성 번역이라고 말한다.
감정이 바뀌면
정체성도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산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더 이상 심리적 장애물이 아니라
삶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산을 옮기는 건
삶을 억지로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삶을 더 정확히 읽는 일에 가깝다.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성장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성장은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기반을 둔 행동,
즉 정체성을 향한 작은 걸음이다.
그 작은 걸음들이
이상하게도
삶의 구조를 바꾼다.
작은 행동이
산의 결을 깎는다.
감정의 이해가
산을 녹인다.
정체성의 재구성이
산의 무게를 가볍게 한다.

성장은 거창하지 않다.
성장은 조용하다.
그리고 성장은
감정과 함께 갈 때만 가능하다.
그게 이 책이 말하려는
가장 본질적인 메시지였다.


책이 말하는 산은 삶의 장애물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그 산이 단순한 감정의 덩어리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에게 준 여러 가지 ‘조건’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나는 늘 어떤 특정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자신을 몰아붙여 왔고
그 모습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마치 실패한 것처럼 스스로를 평가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누군가에게 실망을 주면 안 된다는 두려움,
늘 흔들림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
이 모든 것들이 무겁게 쌓여
내가 스스로 만든 산의 기반이 되었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이런 압박을
‘조건적 자기애’라고 표현한다.
조건을 충족할 때만
우리는 자신을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조건이 흔들리면
자존감도 함께 흔들린다.
문제는 이 조건들이 대부분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도 나에게 완벽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나는 어느 순간
완벽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라 믿어버렸다.
이 믿음은 조용하지만
정체성을 깊고 단단하게 흔들어 놓는다.
산은 감정뿐 아니라
이런 믿음들로부터도 만들어진다.

저자는 우리가 가진 불편한 감정과 자동화된 반응을
“내면의 어린 아이”라고 부른다.
그 아이는 아직 버려진 경험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고
혼자 남겨진 적 있는 상황을 떠올리며
지금의 관계에도 불안을 투영한다.
그 아이는 충돌을 무서워하고
거절을 감당하지 못하고
늘 완벽을 원하며
늘 인정받고 싶어한다.
나는 이 설명을 읽고
마음이 이상하게 무거워졌다.
내 안에도 그런 아이가 분명 있었다.

그 아이는
어른인 척하는 나와 다르게
작은 말에도 쉽게 상처받고
예상치 못한 상황 앞에서
혼자 남겨질까 봐 불안해하며
자꾸 모든 가능성을 미리 걱정했다.
그 아이를 무시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난 늘 강해지려고만 했지
정작 내 안에서 도와달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귀 기울인 적은 거의 없었다.

저자는 그 아이를 억누르려고 할수록
산은 더 단단해진다고 말한다.
산의 본질은 억압이기 때문이다.
억압은 감정의 경직을 부르고
경직은 결국 행동의 경직으로 이어진다.
감정이 굳어지면
사람도 굳는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며
내가 왜 어떤 상황에서 갑자기 굳은 표정으로 멈춰버리는지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사라지듯 관계를 정리하려 했는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반응은 ‘어른인 나’의 반응이 아니라
‘상처받았던 아이의 방어’였다.
감정이 이해받지 못할 때
사람은 성장의 특정 지점에서 멈춘다.

그래서 저자는
산을 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내면의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아이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 감정이 만들어낸 행동 패턴을 이해하는 것.
이것이 산을 녹이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놓치기 쉬운 단계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 아이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괜찮아.
너는 잘하고 있어.
그때는 정말 무서웠을 거야.
이제는 나도 있으니까
조금은 쉬어도 돼.”
이렇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어보니
이상하게도 몸이 조금씩 풀리고
숨이 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감정은 혼자 있을 때 힘을 가지지만
누군가와 연결될 때 힘을 잃는다.
그 누군가가 타인이든
내 자신이든.

저자는 이 부분을
‘감정의 통합’이라고 설명한다.
통합은 이해와 수용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밀어내지 않고
감정이 말하려는 것을 들어주는 것.
감정은 언제나 메시지를 품지만
우리는 그 메시지를 종종 듣지 않는다.
듣지 않으면
감정은 더 거칠게 표현되거나
반대로 너무 깊이 숨어버린다.
둘 다 산을 만든다.

책에서는 감정을 통합하는 구체적인 방법도 제시한다.
가장 먼저, 감정을 느끼는 즉시 판단하지 말 것.
우리는 감정이 나타나면
보통 바로 “이건 좋다, 나쁘다”로 해석해버린다.
하지만 감정은 도덕적 요소가 없다.
그저 신호다.
신호를 도덕으로 판단하면
감정은 억압되고
억압은 패턴을 강화한다.

두 번째로
감정을 느끼는 위치를 정확히 살피라고 한다.
가슴인지, 목인지, 배인지.
감정은 몸의 특정 부위에 고착된다.
이 위치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감정과의 접촉을 만들어준다.

세 번째로
감정에 이름을 붙일 것.
이름을 붙이기만 해도
감정의 세기는 상당히 낮아진다.
저자는
“이름 없는 감정은 더 강한 파괴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감정은 이름이 붙는 순간
형태를 찾고
형태를 찾은 감정은
나를 흔드는 힘을 잃는다.

나는 이 과정을 따라 하면서
오래전부터 내 안에 자리했던 불안이라는 감정에
처음으로 명확한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불안은 나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준비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신호였다.
그 신호를 들을 수 있게 되자
불안의 파괴력은 점점 약해졌다.

책에서 특히 강력하게 다가온 문장은
“감정이 당신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피하려는 행동이 당신을 멈추게 한다”라는 문장이었다.
감정은 멈춤의 원인이 아니다.
멈춤은 회피 때문이다.
감정은 삶의 진행 방향을 막지 않는다.
감정을 피하려는 내가
삶의 방향을 막는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그동안 감정을 ‘적’처럼 생각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감정이 나를 흔들리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나를 흔든 건
그 감정을 외면하는 데 들였던 노력들이었다.
외면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감정을 숨기기 위한 에너지가
삶을 지치게 한다.
그 피로감이
문제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감정을 인정하는 것은
그 에너지 소모를 멈추는 일이다.
그래서 감정을 인정하면
삶이 가벼워지는 것이다.

책에서는
감정의 에너지가 바뀌면
행동의 방식도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두려움이 줄어들면
사람은 시도를 하게 되고
시도는 결과를 만들고
결과는 자신감을 만든다.
감정 하나가
삶 전체의 구조에 영향을 준다.

그렇다면
감정을 다루는 일은
삶의 근본을 다루는 일과 같다.
우리는 보통 삶을 바꾸기 위해
환경을 바꾸고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려 하는데
저자는 그 순서가 거꾸로라고 말한다.
감정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
감정이 바뀌면
환경도, 관계도, 목표도
저절로 조정된다.

이 말을 읽고
나는 그동안 내 삶의 우선순위가
얼마나 뒤죽박죽이었는지 깨달았다.
감정을 무시한 채
문제의 외형만 바꾸려 했던 시간들.
그 외형은
감정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산을 영원히 치워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
산을 제거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산을 이해하는 게 목적이다.
산은 여전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나를 막지 않는다.
산의 의미가 바뀌는 순간
산의 역할도 바뀐다.
산은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라
지침서가 된다.
내가 어디에서 멈추고 있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어떤 감정에서 도망치고 있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산을 없애야 한다고만 생각했던 지난 시절의 나를 떠올렸다.
그때의 나는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결국 힘에 부치면
스스로를 탓하며
다시 무너졌다.
하지만 산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나니
산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은 나에게 적이 아니었다.
산은 나에게
내가 어디에서 멈춰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침묵의 표지판 같은 존재였다.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산을 넘는다’는 말이
어쩌면 우리의 관계 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감정의 교류 위에 놓여 있는데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관계도 흐릿해진다.
산을 안고 사는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어딘가 움츠러들고,
어떤 순간엔 과하게 반응하고,
때로는 과하게 물러난다.
이런 움직임은
상대가 잘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내 안의 산이 흔들리는 방식일 뿐이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누군가에게 상처받는 경험은
산의 형태를 빚는 가장 큰 요소라고 말한다.
사람은 상처받았던 방식으로
다음 사랑을 준비한다.
상처를 주었던 방식으로
다음 관계를 두려워한다.
감정은 기억의 구조에 기반하고
그 기억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며
내가 겪어왔던 몇 개의 관계를
천천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불필요하게 멀어지고 싶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집착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사람과는
아무 이유 없이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관계는
이유 없이 불안했다.
그 모든 느낌들이
상대 때문이 아니라
내 감정 구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처음엔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감정은 상대를 향한 반응이 아니라
내 내면에 쌓여 있던 신호였다.
그 신호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는 관계에서도
산을 계속 재현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문장 중 하나는
“당신은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게 아니라
사랑받아본 적 없는 방식으로 사랑받을까 봐 두렵다”라는 문장이었다.
이 문장은
관계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자기 파괴 패턴을
완벽하게 설명해준다.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방식의 안정감에 오히려 더 불안해진다.
익숙하지 않은 안정은
정체성의 변경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던 내 반응들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다.
좋은 관계에서 느껴지던 미묘한 불편함,
상대가 다정할 때 불안해지는 마음,
동시에 안정감을 원하면서도
안정이 찾아오면 서둘러 도망치고 싶었던 행동들.
이 모든 것이
내가 감정적으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안정감 때문이었다.
나는 불안에 익숙했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안정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이 낯섦을 ‘정체성 통증’이라고 한다.
정체성이 바뀌려 할 때
사람은 통증을 느낀다.
그 통증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패턴으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변화가 불편한 이유는
변화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정체성이 새로운 상태로 이동하기 전
잠시 거쳐야 하는 낯섦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정체성과 감정, 그리고 관계의 구조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저자는
정체성을 바꾸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로
‘도움 요청’을 이야기한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라
산의 무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혼자서 산을 밀어내려는 태도는
오히려 산을 더 단단하게 만들 뿐이다.
산은 연결 속에서 녹는다.
감정은 공유될 때 약해진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때
변화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도움을 요청하는 건
평생 익숙하지 않던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순간들이 있었다.
어떤 날은 도움 요청 한마디였다면
훨씬 덜 고통스러웠을 상황들.
어떤 날은 스스로 버티는 일이
오히려 더 큰 산을 만들고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저자는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이
나약함이 아니라
정직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정직은 탄력성과 연결된다.
감정을 정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감정을 억누르는 사람보다 훨씬 강하다.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감정에 휘둘리는 것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책은 후반부에 이르러
‘삶의 재구성’이라는 주제로 넘어간다.
산이 녹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몇 가지 재배치를 시작하게 된다.
낡은 목표를 재정리하고,
쓸데없이 자신을 힘들게 하던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을 지탱해줄 루틴을 만들고,
감정이 흔들릴 때 돌아갈 수 있는 기준을 세운다.

이 과정은
마치 집을 대대적으로 청소하는 것과 비슷하다.
내 감정의 구조가 바뀌면
그 감정이 머물던 공간도
바뀔 수밖에 없다.
그 공간은
과거의 상처가 놓여 있던 자리일 수도 있고
마음의 모서리처럼
늘 어둡고 무거웠던 구석일 수도 있다.
산이 녹으면
그 자리에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은 다시 새로 채워진다.

책에서는 이 과정을
‘정체성의 재배열’이라고 설명한다.
정체성이 재배열되면
사람은 전보다 훨씬 덜 흔들린다.
감정이 지나갈 자리를 만들어두기 때문에
감정이 쌓이지 않는다.
감정이 쌓이지 않으면
산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면서
내 삶에도 이런 재배열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명확히 인정했다.
어떤 목표는
그 목표가 내 욕구가 아니라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좋아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에 놓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습관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잠시 잊기 위한 도피였다.
이 모든 것을 인정하는 일이
처음엔 무거웠지만
그 인정이 주는 해방감이
의외로 컸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산이 사라지면
삶은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산이 사라지는 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산을 통해 자신을 이해한 사람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 태도의 변화가
삶의 구조를 바꾼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찾았다.

“당신은 산을 옮기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산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산을 이해하는 순간
당신의 삶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그동안 나를 버티게 했던 고집들이
천천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산을 넘기 위해
그토록 애쓰던 날들의 감정이
조금씩 정리되었다.
산을 정복하려는 태도는
항상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산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이미 나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산을 이해한다는 건
내 감정의 기원을 이해하는 일,
나의 반복되는 패턴을 찾아내는 일,
그 패턴을 부드럽게 수정하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불완전해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일이었다.

용기는 항상 큰 행동에서 나오지 않는다.
때로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그 작은 순간에서
가장 큰 용기가 만들어진다.
그 용기가
산을 녹인다.
그리고 결국
산을 움직인다.


책을 읽으며 한 가지 계속 마음에 남았던 것은
산을 이해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점이었다.
감정의 기원을 파고들고
반복된 패턴을 들여다보고
두려움의 모양을 관찰하는 일은
결국 내가 지금까지 누구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다시 묻는 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름대로 정의해왔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사람,
책임감이 있는 사람,
감정적으로 깊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그 정의들은 대부분
내가 되고 싶었던 ‘이미지’에 가깝지
정작 내 실제 모습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 갭이 바로 산이었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정체성은 스스로 만든 이미지가 아니라
감정의 총합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감정을 따라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정체성을 만든다.
즉, 정체성은
내가 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감정적 반응이다.

이 설명을 읽는 순간
내 내면의 산의 형태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말로는 단단한 사람을 자처했지만
실제로는 작은 거절에도 민감했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의외로 쉽게 불안해지곤 했었다.
그 불안을 잘 들여다보면
대부분 내가 느끼는 감정이
지금 상황 때문이 아니라
과거에 멈춰 있던 감정 때문이었다.
산은 내게 늘
‘너는 이 감정을 아직 해결하지 않았어’라는
조용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감정을 해결하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저자는 이 과정이
“나를 다시 배우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보다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에는
부정하고 싶은 감정,
감추고 싶은 기억,
회피하고 싶은 패턴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 감정이 만들어낸 선택들,
그 선택이 만들어낸 결과들,
그 결과가 다시 내 감정을 어떻게 강화했는지가
한꺼번에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이때 사람은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불편하지만
산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다.
감정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삶도 움직인다.
그 움직임이 바로 변화다.

책에서는
자기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
‘감정적 용기’라고 말한다.
감정적 용기는
무언가 큰 결심을 하는 용기가 아니라
도망치고 싶을 때
잠시 멈추고
감정에 대해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능력이다.
“나는 지금 두렵다”
“나는 사실 이 상황이 힘들다”
“나는 이 관계에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런 말들은
방어를 해제시키고
감정을 움직이게 한다.
감정이 움직여야
산이 녹기 시작한다.

나는 이 말을 읽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순간
감정적 용기를 내지 못했는지를 떠올렸다.
말 한마디면 충분했을 상황에서도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서
감정을 덮어버린 적도 많았다.
그 선택이
산의 표면을 더 매끄럽게 굳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오래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은 또한
감정을 다루는 과정에서
‘낯설음’이라는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은 익숙한 감정에는 잘 적응하지만
새로운 감정에는 서툴다.
평생 불안이 기본값이었던 사람은
안정이 오히려 낯설고 어색하다.
평생 외로움 속에서 자신을 조절해온 사람은
진짜 친밀감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평생 자책을 해온 사람은
따뜻한 칭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저자는 이 낯섦을
‘성장의 통과의례’라고 표현한다.
낯섦을 견디는 일이
정체성을 진짜로 바꾸는 과정이다.
낯섦을 피하면
우리는 다시 익숙한 고통으로 돌아간다.
고통은 힘들지만
익숙하면 안전하게 느껴진다.
인간은 익숙함과 안전함을
같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고통을 반복할지라도
그 고통이 익숙하다면
사람은 그 자리에서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이 설명은
나는 왜 특정한 감정을 반복했는지
더 깊이 이해하게 해주었다.
익숙한 감정이 때로는
편안함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익숙한 불안,
익숙한 자책,
익숙한 걱정,
익숙한 혼자만의 해결 방식.
이 익숙함 자체가
산을 떠받치는 돌들이었다.

산을 옮기는 건
익숙한 감정의 집을 나오는 일이다.
익숙함을 떠나는 건 두렵지만
그 두려움은 새로운 삶의 문턱에 있다는 신호다.
저자는
“불편함이 느껴지는 방향이
대부분 성장의 방향이다”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내 삶의 많은 모호했던 장면들을
정확하게 짚어준 문장이었다.

감정을 이해하면
사람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새로운 선택은
새로운 경험을 만들고
그 경험은
새로운 정체성을 만든다.
정체성이 다시 경험을 선택하고
그 경험이 다시 감정을 조정한다.
이 순환이
산을 녹이는 과정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자기 파괴를 멈추는 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 핵심은
자기 파괴를 멈추려 하지 말고
자기 파괴의 의도를 이해하라는 것이다.
자기 파괴는
무조건적으로 잘못된 행동이 아니다.
그 행동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과거의 내가 택했던 최선의 방식일 수 있다.
그 의도를 이해하는 순간
자기 파괴는
나를 위협하던 적이 아니라
나를 지키려 했던 지난 감정의 흔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이해하면
자기 파괴의 세기는 약해지고
그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는 이 부분에서
특별히 마음이 깊게 움직였다.
왜냐하면
내가 평생 동안 ‘문제’라고 느껴왔던 몇 가지 습관들이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 인정은
나를 약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부드럽고 안정되게 만들었다.
감정의 본질을 이해할 때
사람은 더 강해진다.

책은 마지막 장으로 갈수록
산이 사라진 이후의 삶을 상상하게 만든다.
산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된 형태로 재배치된다.
그 산은 나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멈추는지를 알려주는
지침이 된다.

산이 녹고 난 뒤
사람은 삶을 더 부드럽게 살아간다.
감정을 숨기지 않기 때문에
감정이 쌓이지 않는다.
감정이 쌓이지 않으면
패턴이 단단해지지 않는다.
패턴이 단단해지지 않으면
정체성도 유연해진다.
정체성이 유연해지면
사람은 삶의 많은 순간들을
더 가볍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덮는 순간
한 가지를 아주 깊게 깨달았다.
산을 옮기는 일은
나를 바꾸는 일과 같지 않다.
산을 옮기는 일은
나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해는 변화를 강요하지 않는다.
이해는 변화가 자연스럽게 오도록 만든다.

산은 결국
우리가 감정과 정체성을 통해
스스로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그 메시지를 해석하는 순간
산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산이라는 비유를 받아들이고 나면
사람은 자신이 겪어온 수많은 장면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예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던 반응들이
이제는 감정의 구조와 연결되어
조금씩 설명이 가능해진다.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은
무섭지 않다.
이해되는 감정은
행동을 바꾼다.
행동이 바뀌면
삶의 결도 바뀐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나는 ‘산’이란 단어를
더 이상 장애물의 상징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산은 문제의 실체가 아니라
문제가 있는 지점을 알려주는 표식 같았다.
이 표식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이 표식 덕분에
내가 어떤 감정에서 멈춰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사람이 산에서 벗어나는 방식 중 하나로
‘자기 개입’을 이야기한다.
자기 개입이란
습관적으로 돌아가던 감정의 길을
의도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틀어주는 행동이다.
감정은 본래 습관적이다.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반응하고
그 예측은 대부분 과거 경험에 기반한다.
감정이 만들어낸 습관의 길은
오래 걷지 않아도
쉽게 되살아난다.
그래서 새 길을 만들려면
의도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는 순간
그 상처가 과거의 기억을 자극해
자책으로 이어지는 패턴이 있다고 하자.
그 순간의 개입은
자책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상처받았다”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
감정의 흐름이 바뀐다.
감정은 인정받는 순간
저항을 멈춘다.
감정이 흐르기 시작하면
패턴도 강제적으로 반복되지 않는다.

나는 이 방법을 일상에 적용해보면서
감정의 결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불편한 상황이 오면
감정이 몸보다 먼저 반응했다.
하지만 감정을 바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니
감정이 한 박자 느리게 움직였고
그 사이에 숨을 고를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은 아주 짧지만
감정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결정적인 틈이었다.
이 틈이 쌓이면
사람은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살지 않게 된다.

저자는 이 틈을
‘자기 인식의 공간’이라고 부른다.
이 공간이 커질수록
사람은 삶을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감정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관찰하고
필요할 때 방향을 수정할 수 있다.
감정이 삶을 주도하던 자리에서
이제는 내가 감정을 부드럽게 이끌어간다.

나는 이 공간이 커지는 경험을
어느 순간 매우 분명하게 체감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무심코 던진 말이
내 마음에 이상하게 오래 남아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르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곧바로
“또 내가 잘못했나?”
“역시 나는 부족하지.”
라는 생각으로 흘러갔을 텐데
그날은 조금 달랐다.
내 안에서
“잠깐만, 이건 예전 상처 때문에 과잉 반응하는 것 같아”라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작은 목소리가
감정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자책으로 향하던 길이
그 순간 멈춘 것이다.
감정이 멈추니
몸도 멈췄다.
호흡이 정리되고
생각도 잦아들었다.

브리아나 위스트가 말하듯
산은 이렇게 조용히 녹는다.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아주 작은 깨달음 하나가
감정의 결을 바꾸고
그 변화가 삶의 방향 전체를 바꾼다.

산이 녹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뀐다.
나는 예전에는 늘
내 단점과 부족함에 먼저 눈이 갔고
그것을 고쳐야만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책은
성장은 부족함을 고치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깊이를 넓히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처음엔 잘 이해되지 않았는데
여러 회차를 써 내려가고
여러 감정들을 들여다보면서
조금씩 체감할 수 있었다.

사람은 완벽해지기 위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 성장하는 것이다.
이해는 완벽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해는 여백을 만든다.
여백은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누구도 완벽하게 다듬어진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모서리가 있고
무게가 있고
불균형이 있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예민하고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무뎌 있다.
성장은 그 모양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모양을 스스로 알고
그 모양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유연함을 얻는 일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평생 나를 괴롭혀왔던 “왜 나는 이럴까”라는 질문이
어느 순간
“아, 그래서 내가 이랬구나”라는
다른 질문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질문이 바뀌면
태도도 바뀐다.
이전 질문은 비난이었지만
새로운 질문은 이해였다.
이해는 스스로에게 여유를 준다.
그 여유가 바로
산을 녹이는 힘이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감정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태도로
‘부드러움’을 이야기한다.
부드러움은 약함이 아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
감정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는 태도이다.
강하게 버티는 사람보다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오히려 감정의 폭풍을 통과하는 데 훨씬 오래 견딘다.

나는 이 말을 읽고
이상하게 울컥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버티는 방식으로만 살아왔기 때문이다.
버티면 강해지고
참으면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버티는 방식은
언젠가 감정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을 만든다.
부드러움은
감정이 부서지지 않도록
흐를 수 있는 길을 마련한다.
그 길이
산을 서서히 녹인다.

책은 마지막으로
산을 넘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크게 달라지는 점을 말한다.
바로 ‘평온함’이다.
산이 있을 때는
항상 마음 한쪽이 불안하고
감정을 예측할 수 없어
관계와 목표에서 흔들림이 많다.
하지만 산의 위치를 알고
산의 구조를 이해한 사람은
감정이 올라와도
그것이 자신을 뒤흔들지 않는다는 걸 안다.
평온함은 문제의 부재가 아니라
자기 이해의 결과다.

나는 이 평온함이
이 책이 결국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고 느꼈다.
평온함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감정을 이해하고
감정의 나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이다.

산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산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산이 적이 아니라
지침이 되는 것이다.
산이 막음이 아니라
출구가 되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수없이 멈춰 서서
내 감정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왜 어떤 관계 앞에서는
유독 불안해지는지.
왜 어떤 목표 앞에서는
자꾸 회피하게 되는지.
왜 어떤 말은
몇 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지.
왜 나는 어떤 순간
갑자기 마음이 굳어버리는지.

그 질문들의 답이
하나씩 풀려갈 때
산의 그림자가 조금씩 밝아졌다.
산은 버려야 할 짐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시간의 기록이었다.
그 기록을 이해하는 순간
산은 더 이상 나를 막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이 단순히
‘자기계발서’라는 범주에 머물지 않는 이유를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야
진짜로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자기 이해에 대한 책이고,
감정의 구조에 대한 책이며,
상처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어떻게 다시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가에 대한 책이다.

산을 옮기는 일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다.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사람은 감정의 자유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 자유가
삶의 전부를 바꾼다.


책을 계속 읽다 보면
보이지 않는 산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조금씩 윤곽이 잡힌다.
산은 한 번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은 오해,
작은 상처,
작은 부정,
작은 체념이
오랜 시간 굳어지면서
어느 순간 커다란 덩어리가 된다.
그 덩어리를 사람들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건 못 해’
‘나는 저런 상황이 무서워’
와 같은 말로 설명한다.
하지만 그 말들은
실체라기보다
감정의 굳음에 가깝다.
감정이 굳으면
사람도 굳는다.
감정이 유연하면
사람도 부드러워진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산을 만든 재료 중 가장 힘이 센 것이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두려움은 언제나
실패보다 먼저 도착하고
상처보다 더 오래 남는다.
두려움이 감정의 결을 지배하면
사람은 더 이상 가능성으로 움직이지 않고
안전이 보장된 최소한의 선택만 하게 된다.
그 선택은
그 순간에는 안전해 보이지만
오래 지속되면
정체성을 닫아버린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왜 오랫동안
몇몇 기회를 붙잡지 못했는지
왜 중요한 결정 앞에서
스스로 움츠러들었는지
그 이유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두려움은 합리적 사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과거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착시였다.
현재 상황과 상관없이
과거의 상처를 기준으로
미래를 예측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미래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선택도 좁아지고
삶도 좁아진다.

저자는
두려움을 없애려 하지 말고
두려움의 역할을 이해하라고 말한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준비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하나의 표시일 뿐이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은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보통
성장이 필요한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두려움을 대하는 태도가 처음으로 바뀌었다.
이전에는 두려움을 피해야 할 감정,
없애야 할 감정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두려움이 알려주는 위치를 따라가 보려고 한다.
그 길이 불편하더라도
그 불편함이
새로운 가능성의 문턱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게 던진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익숙한 삶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였다.
이 질문이 가장 아프기도 하고
가장 오래 남기도 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익숙함과 안정감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익숙함은 안전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반복일 뿐이다.
반복은 편하지만
성장은 반복의 바깥에 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정말 원하는 것과
익숙해서 지속해온 것 사이의 차이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
익숙한 관계,
익숙한 목표,
익숙한 책임감,
익숙한 패턴들이
마치 나를 구성하는 본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의 흔적이 축적된 결과였다.
이 결과를 바꾸려면
감정의 방향을 바꿔야 했다.

책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개념 중 하나는
‘정체성의 저항’이다.
정체성의 저항은
사람의 삶을 가장 강하게 붙잡는 힘이다.
정체성을 바꾸려 하는 순간
사람은 자동적으로 거부감을 느낀다.
지금의 모습이 나에게 행복을 주지 않더라도
지금의 방식이 익숙하기 때문에
정체성은 변화보다 머무름을 선택한다.
머무름은 편하지만
그 편안함은
시간이 지나면 불편함으로 바뀐다.
왜냐하면
감정은 계속 움직이는데
정체성이 멈추어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이상하게 오래 묵직해졌다.
나는 그동안
내 정체성이 흔들릴까 봐
내 감정을 억누른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나에게
새로운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나는 정체성이라는 틀을 유지하기 위해
내 감정을 외면했다.
외면된 감정은
언젠가 매우 강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 폭발은
산을 더 크게 만든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변화의 핵심은
정체성이 아니라
감정의 이해라고 말한다.
감정을 이해하면
사람은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다시 조정할 수 있다.
정체성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내가 감정을 바라보는 방식의 결과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이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 중 하나라고 느꼈다.
사람은 정체성을 바꾸려고 애쓰지만
정체성은 억지로 바뀌지 않는다.
감정이 바뀌면
정체성이 자연스럽게 단계를 넘어간다.
감정의 위치를 이해하면
정체성은 그 방향으로 미세하게 재배치된다.
그 재배치가
삶의 방향을 바꾼다.

책은 특히
‘자기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기 용서는
감정을 돌려놓기 위한
가장 중요한 마지막 단계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감정적 오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지나간 행동,
그때의 선택,
그때 하지 못했던 말,
그때 지켜내지 못했던 나 자신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붙잡아둔다.
그 붙잡음이
산의 중심을 이루는 암석층이 된다.

나는 이 설명을 읽고
내 안에 자리한 오래된 무게들을
조금씩 꺼내볼 용기가 생겼다.
그 무게를 꺼내는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해방이었다.
그것은 나를 비난하는 과정이 아니라
나에게 돌아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책은
감정의 회복이 끝난 사람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변화를 말한다.
가장 큰 변화는
불안이 질문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 상황이 또 나를 흔들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있었다면
이제는
‘왜 이 상황이 나를 흔드는 걸까?’라는 질문이 생긴다.
불안은 미래를 막지만
질문은 미래를 연다.
질문이 가능한 상태는
감정이 이미 절반 이상 정리되었다는 의미다.

나는 이 변화를
최근에서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불확실한 상황이 오면
막연한 두려움부터 먼저 올라왔는데
이제는
그 두려움의 출처를 더 먼저 찾게 된다.
이 변화는 아주 작아 보이지만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변화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브리아나 위스트는 말한다.
“산은 당신의 적이 아니다.
산은 당신이 어디에서 멈춰 있는지 알려주는 지점이다.”

이 문장은
내 깊은 곳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산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과정이라는 뜻이었다.
문제를 없애려는 태도에서
문제를 이해하려는 태도로 바뀌는 순간
산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산이 남아 있더라도
더 이상 나를 막지 않는다.
산이 높아 보이더라도
이제는 방향을 잃게 하지 않는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지만
나는 그 산을 넘어갈 힘을
이미 조금씩 갖춰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은
어떤 의지나 결심이 아니라
내 감정과 나 자신을 이해한 데서 나온다.
이해는
산을 옮기는 진짜 힘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변화라는 것이 거대한 결심이나
극적인 순간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늘 뭔가 ‘특별한 계기’를 기다렸던 것 같다.
삶을 바꿔줄 만한 충격,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꿔줄 경험,
혹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 같은 것.
하지만 책을 읽으며 깨달은 건
산을 옮기는 일은
그런 극단적인 어떤 사건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감정의 움직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건
큰 폭탄이 아니라
작은 습관,
작은 인식,
작은 인정이었다.
그 작은 것들이 쌓여
어느 순간 큰 흐름을 만들어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감정은 거대한 파도처럼 몰아치는 순간도 있지만
대부분은 물결처럼 미묘하게 움직인다.
파도는 눈에 띄지만
물결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물결이 방향을 바꿀 때
파도의 모양도 완전히 달라진다.
저자는 감정의 물결을 보는 사람이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물결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정체성이 바뀌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말에 오래 머물렀다.
왜냐하면
내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은
감정의 ‘파도’ 때문이 아니라
감정의 ‘물결’을 보지 못한 데서 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던 불안,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무기력,
작은 관계 속에서 반복되던 패턴들이
사실은 모두
감정의 물결이 조금씩 한 방향으로 쏠리고 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나는 그 신호를 보지 못하고
파도가 치는 순간에만
뒤늦게 허둥대며 대응했다.
그러니 그 순간은 늘 너무 늦었다.
감정의 결이 이미 굳어진 뒤였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감정의 물결을 감지하는 능력을
‘자기 감각’이라고 정의한다.
자기 감각이 발달한 사람은
감정의 초반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 움직임이 어디로 향하려 하는지
몸, 말, 표정, 호흡 같은 삶의 작은 징후들로 알 수 있다.
감정이란 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몸은 늘 가장 먼저 반응한다.
머리는 가장 나중에 반응한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
내 몸의 작은 변화들을 살피는 습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별한 루틴이라기보다
그저 하루에 몇 번
숨이 짧아지는지,
어떤 순간 어깨가 굳는지,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생각보다 오래 답장을 망설이는지
그 감각들을 의식해보는 정도였다.

놀라운 건
그 아주 작은 관찰들이
내 감정의 흐름을
조용히 바꿔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
관찰하는 태도를 갖게 되니
감정이 나를 침범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감정이 지나가는 속도 또한 빨라졌다.
감정을 억제하면
감정은 생존하려고 더 강해지지만
감정을 관찰하면
감정은 목적을 다했다고 판단하고 사라진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감정을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을
“스스로에게 안전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말은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나 자신에게조차
안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나도 그랬다.
내 감정을 판단하거나
비난하거나
억누르거나
부끄러워했고
어쩌면 그게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외로웠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안전한 사람이 되는 일은
결국 감정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 공간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
“잠깐만, 나 지금 불편하다”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이 작은 인정은
감정이 마음속에서 들끓는 걸 막고
그 감정이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다.

감정은 막힌 곳에서 폭발한다.
통로가 있으면
흐른다.
흐르는 감정은
산이 되지 않는다.

책 후반부에 나오는 개념 중
특히 오래 기억에 남은 부분은
‘감정의 책임성’이다.
감정의 책임성이라는 것은
감정을 통제하라는 뜻이 아니라
감정을 ‘소유’하라는 뜻이다.
감정은 누구도 대신 느낄 수 없다.
감정을 만들어낸 것도 나고
그 감정으로 인해 벌어진 행동 또한
결국은 내가 결정한 것이다.

저자는
감정의 책임성을 갖지 않는 사람은
계속해서 동일한 패턴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패턴을 만든 핵심이
감정인데
그 감정의 흐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감정에 책임을 지라는 말은
어쩌면
그동안 내가 피해자로 느껴왔던
여러 감정들을
다시 제자리로 가져오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누구 때문이든
그 감정을 해석한 건 나였고
그 해석에 따라
내 삶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책이 말하는 핵심은
책임이 곧 자유라는 점이다.
감정의 책임은
감정에 매이지 않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책은 또
자기 파괴의 메커니즘을 깊게 다룬다.
자기 파괴는
겉으로는 나쁜 행동처럼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지금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한다.
정체성을 바꾸려면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
불확실성은 두렵다.
그래서 인간은
성장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익숙한 고통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익숙한 고통은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과거에 했던 몇 가지 반복 행동들이
그저 ‘습관’이 아니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내 무의식의 방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자기 비난을 멈추게 하고
감정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했다.
감정은 ‘문제’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메시지는 읽히기 위해 존재한다.
읽히면 기능을 다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감정을 읽는다는 것이
삶을 읽는 일과 같다는 사실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감정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특정 지점을 가리키는 표지판이었다.
표지판을 읽지 못하면
길을 잃는다.
하지만 표지판을 읽을 수 있으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난 뒤
가장 선명하게 다가온 문장은
다소 단순해 보이지만
내 삶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었다.

“당신은 산을 없애려 하지 말고
산을 이해해야 한다.”

산은 없던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그 산은
지금까지의 나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기록이었다.
그 기록을 부정하면
산은 더 거칠게 반응한다.
하지만
기록을 인정하면
산은 기능을 잃는다.

그리고 그 순간
산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책의 후반부는
산을 이해한 사람이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 변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드라마틱하지 않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하루아침에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거나,
자기 확신이 갑자기 폭발하듯 생겨난다거나,
인생이 단숨에 한 방향으로 정렬되는 식의 변화는 없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사람의 변화는 그렇게 폭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변화는
너무 미세해서
당사자조차 한동안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날,
익숙했던 행동을 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고
그제야 깨닫는다.
아, 내가 달라졌구나.
이것이 산을 옮기는 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산은 삽질로 떠밀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조금씩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변화는
조용하지만,
분명하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겪어 온 작은 변화들이
사실은 산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신호였다는 걸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작은 비판에도
온몸이 굳어버렸는데
어느 날은
같은 말을 들었음에도
그다지 요동치지 않는 나를 본 적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상황이 달라진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무언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느리게 실감했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이런 변화를
‘정서적 탄력성’이라고 부른다.
정서적 탄력성이 생기면
감정의 파도가 밀려올 때
이전처럼 휩쓸리지 않는다.
파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파도는 더 이상
나를 무너뜨리는 힘을 갖지 않는다.
이 탄력성은
감정이 흐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증거다.
감정이 흐르면
감정은 쌓이지 않는다.
쌓이지 않은 감정은
산이 되지 않는다.

감정이 해소되기 시작하면
사람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조금씩 자란다.
저자가 말하는
‘건강한 자기 확신’은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확신이 아니라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에서 생기는 확신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오랫동안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에 과하게 영향을 받았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상대의 표정,
작은 반응이
내 정체성을 흔들 정도로 크게 느껴졌다.
그건
내 안이 텅 비어 있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산이 너무 커서
감정이 흐를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책은
산이 녹기 시작할 때
사람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변화로
자기 경계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자기 경계는
타인을 밀어내는 벽이 아니라
내 감정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선이다.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경계가 분명해진다.
상대의 감정이
내 감정을 대신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화가 난 것은
그 사람의 감정이고
그 감정은 그 사람의 책임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타인의 감정까지도 떠안고 살아간다.
그 무게가
감정의 흐름을 막고
산을 더 크게 만든다.

나는 이 설명을 읽으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타인의 감정까지도 내 감정처럼 떠안고
그 감정의 원인을
내 탓으로 돌리려 했기 때문이다.
감정의 경계가 흐릿하면
산은 빠르게 성장한다.
감정이 내 것이든
타인의 것이든
경계 없이 흡수되기 때문이다.

감정을 명확히 인식하고
경계를 세우기 시작하면
관계도 달라진다.
더 이상
상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내 감정을 희생하지 않는다.
감정을 희생하는 관계는
언젠가 반드시 균형을 잃는다.
균형을 잃은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의 피로를 가져오고
그 피로는 결국
분노, 회피, 과잉 적응 같은 방식으로 표출된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관계의 건강함은
감정이 어떻게 흐르고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감정이 서로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흐르면
그 관계는 이미 경고가 온 것이고
감정이 서로에게 솔직해지는 방향으로 흐르면
그 관계는 변화의 기반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이 말이
관계뿐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느꼈다.
감정이 나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
내 삶은 늘 힘들었다.
하지만
감정이 나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흐를 때
비로소
평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책 후반부에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은
‘자기 진실’이다.
자기 진실은
어떤 거대한 통찰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깨달음들에 가깝다.
예를 들면,
나는 이 상황이 정말로 불편하다.
나는 누군가의 기대만큼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지금 쉬어야 한다.
나는 이 감정이 아직 낯설다.
나는 이 행동이 사실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런 사실들을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될 때
산은 크게 흔들린다.
왜냐하면
산은 거짓된 확신 위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산의 반대편에 있다.
사람은 진실할 때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
내가 그동안 자신에게 쓰지 못했던 말들을
조금씩 써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 문장들은
내가 지나온 길을 정리해주는 느낌이었다.
감정은
말로 표현되는 순간
그 형태를 드러낸다.
형태를 찾은 감정은
흐를 수 있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글쓰기, 말하기, 기록하기가
감정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감정은 언어를 만나야
자기 자리를 찾는다.
언어는
감정의 방향을 정해주는 지도이다.

나는 이 말을 읽고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이름이 없던 감정들은
자꾸 산으로 굳어갔고
그 굳은 감정들이
나를 특정한 방식으로 묶어두고 있었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감정을 언어로 옮기는 일은
감정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진짜 형태를 찾는 일이다.
그 형태가 보여야
그 감정을 다룰 수 있다.
그 감정을 다룰 수 있어야
산이 움직인다.

책의 거의 마지막 장에서
브리아나 위스트는 말한다.
“당신이 원하는 삶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감정의 방향을 바꿨을 때
그 삶이 당신 앞으로 다가온다.”

이 문장에는
노력과 결과에 대한
조용한 진실이 담겨 있었다.
삶을 바꾸는 것은
목표가 아니라
감정의 흐름이다.
감정이 앞으로 향하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간다.
감정이 멈추면
삶도 멈춘다.
삶이 흐르지 않을 때
사람은 정체성을 의심한다.
하지만 정체성의 문제는
대부분 감정의 문제였다.

이 책은 결국
감정의 흐름을 다시 열어주는 책이다.
그 흐름이 열리면
사람은 다시 움직인다.
움직임이 생기면
삶은 다시 살아난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산을 옮기는 일이
거대한 전투나
폭발적인 도약이 아니라
감정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조용히 이해하게 되었다.

산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산을 지나갈 길을
조금씩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감정의 움직임을 이해한 내가
조용히 닦아내는 길이었다.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이 책의 핵심이 ‘산’이 아니라
‘나’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산은 상징일 뿐이고
진짜로 움직여야 하는 것은
결국 내 감정,
내 믿음,
내 행동,
내 정체성이다.
이 사실이 선명해지는 순간
사람은 책을 읽는 독자에서
자기 삶을 다시 써 내려가는
주체로 이동한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사람이 변화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를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붙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이야기는 대부분
어린 시절에 만들어지고
성인이 되어서도
별다른 검토 없이 반복된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파악하기보다는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오래된 이야기를 붙들며 살아간다.
그 이야기 속에서
삶의 많은 가능성이 막히고
감정의 흐름도 멈춰버린다.

나는 이 말을 읽으며
조금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평생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믿음의 대부분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과거의 환경이나 기억이 만들어준 것에 불과했다.
그 이야기는 내 것이 아니었는데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붙잡을수록
산은 더 단단해졌다.

책은
‘자기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일’을
가장 강력한 변화의 도구로 제시한다.
다시 쓴다는 건
과거를 없애거나
모든 기억을 긍정적으로 바꾸라는 뜻이 아니다.
그저
“그 시절의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인정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연결해준다.
그리고 그 연결이 만들어지는 순간
산의 기반이 무너진다.

그동안 나를 잡아두던 많은 감정들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 감정들이 나를 규정하던 힘은 약해진다.
감정이 다르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감정의 해석이 바뀌면
감정의 기능도 바뀐다.
과거의 감정은
내가 부족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에게 필요했던 감정이었다.

이렇게 감정을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예전에는
“왜 나는 늘 이런 감정을 반복할까?”라고 자책했다면
이제는
“그 감정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구나”라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된다.
이해는
감정을 녹이는 힘을 가진다.
감정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그 감정은 산을 떠받치지 못한다.

책에 나오는 한 문장은
내 마음을 유난히 오래 붙잡았다.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 이후의 나다.”

이 문장은
심리적 성장의 핵심을 찌른다.
사람은 성공이나 변화 자체가 아니라
변화 이후의 나를 두려워한다.
지금까지 유지해온 정체성이
무너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무너지는 건
존재가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은
더 나은 삶을 원하면서도
막상 눈앞에 변화를 두면
뒷걸음질 친다.
그 이유가
게으름이나 의지 부족이 아니라
정체성의 생존 본능 때문이다.

나는 이 진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나는 오랫동안
도전하지 못한 이유를
의지 부족,
능력 부족,
혹은 환경 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나’를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
부족함은 아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정체성의 견고함을 무너뜨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미세한 행동 변화’라고 말한다.
즉,
큰 결단이나 드라마틱한 움직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아주 작은 새로운 행동 하나가
정체성을 조금씩 흔들고
산의 중심을 약하게 만든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행동을 반복하는지에 따라
자신을 누구라고 정의하게 된다.
그 정의가 달라지면
정체성은 자연스럽게 재구성된다.

나는 이 부분이
특히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오랫동안
고치려고 애써왔던 감정적 패턴들이
큰 결심으로는 절대 바뀌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다.
감정은 결심보다 습관에 반응한다.
습관은 반복을 기반으로 하고
반복은 아주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작은 행동은
정체성의 문을 아주 조용히 연다.
그 문은
언뜻 티가 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삶 전체의 공기를 바꾼다.

저자는
이 작은 변화들의 축적을
‘정체성의 상승’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정체성은
단 한 번의 결정이 아니라
작은 행동 수천 개의 축적이다.
그 행동들이
어느 방향으로 반복되느냐에 따라
산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산이 녹아내리기도 한다.

나는 이 말을 읽었을 때
희미한 안도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큰 사람이 되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작은 행동을 조금씩 바꾸기만 해도
삶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 깊숙이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은 행동의 변화는
누구나 시작할 수 있다.
에너지가 없을 때도,
기회가 없을 때도,
환경이 바뀌지 않았을 때조차 가능하다.
작은 행동 하나만 있다면
정체성은 움직일 수 있다.

산은
바위가 굴러가듯 옮겨지는 것이 아니다.
산은
얼음이 햇빛 아래서
아주 천천히 녹듯
조금씩 사라진다.

이 느린 변화가
오히려 진짜 변화다.
빠른 변화는
대개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면의 속도에 맞춰 움직인 변화는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변화는
정체성의 뿌리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책을 덮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스스로에게
이 질문을 남겼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이
나를 멈추게 하고 있는가?”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감정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이 감정들이
산의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이 감정을 이해하는 순간
나는 이미
산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책은 결국
이 메시지로 이어진다.

산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산을 옮기는 힘도
내 안에 있다.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삶을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아주 천천히
그 길 위를 걷기 시작했다.


책에서 말하는 산의 마지막 의미는
어쩌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문제의 해결이나
자기 계발의 성취와는
조금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책은 어디에서도
“이렇게 하면 산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산은 평생 존재할 수도 있으며
그 산의 모양이 인생의 단계마다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읽을수록 깊게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평생
새로운 감정을 배운다.
새로운 관계를 경험하고
새로운 상처를 받고
새로운 두려움과 마주한다.
그러니 산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이
정말 존재할 리 없다.
중요한 건
그 산이 더 이상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 상태였다.
산은 있어도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더 이상 방해가 되지 않는 상태.
책은 그 지점을
‘자유’라고 표현했다.

자유는
장애물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장애물을 이해하는 상태였다.
이 말은 묘하게 오래 남았고
나는 그 의미를
내 삶에 천천히 대입해보았다.

돌아보면
나는 오랫동안
장애물이 없는 인생을 꿈꿨다.
고통도 없고
흔들림도 없고
불안도 없는 삶.
하지만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할 수도 없었다.
감정이 있는 인간에게
장애물이란
살아 있음의 증거와도 같았다.
감정이 움직이는 한
산은 생겨난다.

책을 읽으며
나를 괴롭히던 많은 질문들이
어느 순간 한 방향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왜 나는 이런 상황이 힘들까?”
“왜 같은 패턴이 반복될까?”
“왜 어떤 순간엔 과하게 움츠러들까?”
“왜 여전히 어떤 감정은 어렵게 느껴질까?”

그리고 답은
언제나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정체성.
감정.
과거.
패턴.
두려움.
산.
이 단어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내 삶을 설명해주는 하나의 체계처럼 느껴졌다.
그 체계를 이해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전까지 나는
내 감정이 너무 복잡하고,
내 모습이 흔들리기 쉽고,
내 반응이 때때로 이해되지 않는 이유를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나조차도
내가 왜 나인지 설명할 수 없던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그 질문들의 답이
사실 아주 단순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내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감정을 이해하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자기를 이해하면
혼란이 줄어든다.
혼란이 줄어들면
삶은 덜 흔들린다.

산이란 사실
복잡함의 상징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던 감정들,
정리되지 않던 기억들,
과거의 자신이 남긴 흔적들의
덩어리였다.
이 덩어리가
한꺼번에 무겁게 느껴질 뿐이었다.
덩어리가 풀어지기 시작하면
그 안에 있던 감정의 조각들이
하나씩 빛을 찾는다.
그 조각들이
산을 녹였다.

책의 어떤 구절에서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고통이 아니라
성장의 재료라고 했다.
감정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삶을 진지하게 경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감정이 깊다는 것은
그만큼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이 해석을
조용히 마음속에 오래 두었다.

나는 감정이 깊은 사람들을
종종 복잡하거나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책을 읽고 나니
그 감정의 깊이가
어쩌면 가장 큰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깊은 사람은
더 크게 흔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더 깊이 성장할 수 있다.
감정은
성장의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기 인생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대체로 ‘감정적으로 정직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정직은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이다.
그 용기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것이다.

낯설지만
어떤 진실은
우리의 삶을 구한다.
우리가 회피하던 진실들이
사실은
산을 녹일 수 있는 열원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그 열을
너무 오랫동안 잃어버린 채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회피하는 삶은
안전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위험한 삶이었다.
감정이 쌓이고 쌓여
산이 커지고
그 산이 결국
나를 막는 방식으로 자리 잡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다다르면
사람은 어느 순간
산을 없애는 것보다
내가 산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드럽게 이해하게 된다.
산을 없애려고 할 때는
산이 적처럼 느껴지지만
산을 이해하게 되면
산은 내 삶의 일부가 된다.
그게 책이 말하는
‘내면의 성숙’이었다.

성숙은
감정을 완전히 치유하는 것이 아니다.
성숙은
감정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감정이 올 때
그 감정을 미워하지 않고
감정이 지나갈 때
그 감정을 억지로 붙잡지 않는 태도.
그 태도가 자리 잡으면
사람은 더 가벼워진다.
감정의 무게가
나를 내리누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에 여전히 산이 남아 있음을 안다.
그 산은
어느 날은 크게 느껴지고
어느 날은 거의 사라진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산이 더 이상
나를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산은 그대로 있어도
나는 움직일 수 있다.
산을 이해했기 때문에
산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브리아나 위스트는 말한다.
“산은 당신이 어디에서 멈춰 있었는지를 알려주지만
당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막지는 않는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아주 조용하게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싶어졌다.
거창한 결심도 아니고
영웅적인 다짐도 아니었다.
단지
감정을 조금 더 이해하며 살고 싶다는
그 소박한 바람만이 남았다.
이 바람이
산을 움직이는 진짜 힘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산을 없애려 하지 않는다.
산을 지나가는 내가 되기를 바란다.
그 길 위에서
감정은 나를 가로막는 돌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작은 발자국들일 뿐이다.

산은 걷는 사람에게 길을 내주고
그 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제
그 길을 걷는다.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르지만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삶을 움직인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이면
당분간은
충분하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묘하게 조용해진다.
감정이 아주 깊은 곳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고
그 가라앉음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를 걷는 중인지
잠시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처음에는
‘산을 옮긴다’는 말이
너무 큰 주제처럼 느껴졌고
내 삶과는 조금 멀리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산은 너무도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내 안에 있었고
내 감정 속에 있었고
내가 반복하던 습관 사이에 숨어 있었다.

산이란 결국
나를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짐처럼 지고 있던 것들의 집합이었다.
설명되지 않으면
그 감정은 나를 눌렀고
그 눌림이 쌓여 산이 되었다.
그러니 산을 옮기는 일은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감정의 언어를 다시 배우는 일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 것을 바꿔놓는지
조금씩 몸으로 알게 되었다.
감정을 억누르던 삶에서
감정을 들어주는 삶으로 옮겨갈 때
내 삶의 결이 조용히 바뀌었다.
그 변화는 아주 작았고
어떤 날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작은 변화를 반복해온 시간들이
내 안의 산을 서서히 녹게 만들었다.

사람이 감정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을 향한 비난이 줄어든다.
비난이 줄어들면
자기 조절이 가능해진다.
자기 조절이 가능해지면
관계가 정리된다.
관계가 정리되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체성의 구조가 바뀐다.

정체성이 바뀌면
사람은 결국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나는 책을 덮고 난 후
이 ‘전혀 다른 방식’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그건 거창한 변화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는 방식,
감정이 올라올 때 숨을 한 번 고르는 방식,
누군가의 말에 무너지는 대신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을 구분하는 방식,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방식.

이 작은 방식들이
내 삶을 다시 짜고 있었다.

책은 마지막까지
독자를 다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문장도 없고
“지금 바로 변화하라”는 요구도 없다.
오히려 책은
감정의 속도에 맞추어 움직이라고 말한다.
삶은 서두른다고 빨라지지 않고
감정은 억누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일깨운다.

나는 그 메시지가
책 전체에서 가장 다정한 위로라고 느꼈다.
내 감정의 속도가
언제나 남들보다 느린 것 같아
조급해지던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은
각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고
그 리듬이 빠르다고 좋은 것도,
느리다고 나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은 거듭 말해준다.

삶은
각자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 감정을 이해하는 사람이
자기 리듬을 찾는다.

책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난 밤,
나는 오랜만에
내 마음을 조용히 들어다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작고 큰 산들이 있었다.
어떤 산은 오래된 감정이었고
어떤 산은 최근의 관계였고
어떤 산은 아직 말로 설명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산들을 보면서
이전처럼 숨이 막히지 않았다.
산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나는 이미
그 산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산을 이해하는 눈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꾼다.
태도가 바뀌면
삶의 방향이 바뀐다.
방향이 바뀌면
내가 걸어가는 길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그 길에는
이전처럼 무거운 짐이 없다.
짐은 그대로지만
그 짐을 드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내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에 자리를 내어주고
잠시 머물게 한다.
감정은
머물다 보면 흘러간다.
흘러가고 나면
거기엔 검은 그림자 대신
정리된 문장들만 남는다.
그 문장들과 함께
산도 조금씩 작아진다.

책의 마지막 한 구절이
지금 다시 떠오른다.

“당신은 산을 옮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다.
당신은 산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문장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내가 살아온 방식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산을 이해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의 핵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조금
그 길 위에 발을 올릴 수 있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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