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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치유자

이 책을 처음 펼쳤던 날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날은 단순히 피곤한 정도를 넘어서,
사람을 돕는다는 일이 왜 이렇게 나를 고독하게 만드는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무거움이 마음을 짓누르던 시기였다.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작 내 속은 조용히 닳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알면서도,
동시에 아무 말도 꺼낼 수 없는 밤들이 이어졌고,
마음속에서는
“나는 왜 이렇게 지쳐 있을까”
“사람을 돕는 일이 왜 이렇게 나를 비워 놓을까”
이런 질문만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책장 한 구석에 오래 꽂혀 있던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읽었던 때는 그저 좋은 문장 몇 줄만 건져내고
그저 따뜻한 영성서 하나를 만났다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너무 다른 마음으로 책을 펼치게 되었다.
마치 오래된 편지를 뒤늦게 제대로 읽게 되는 것처럼
이 책이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책의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나우웬의 문장이 조용히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는 우리가 늘 상처를 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잔인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렇다고 감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정확하게 말해낸다.
사람들은 치유를 원하면서도
자신의 상처는 끝까지 숨기려 한다.
사역자든, 상담자든, 봉사자든, 부모든,
누군가를 돌보는 자리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상처라고.

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멈춰 버렸다.
사람을 돕는 일이라고 믿었던 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내 상처를 감추기 위해 더 바쁘게 움직였던 시간은 아니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그 갈망 속에는
‘상처를 가진 나’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돌봄과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나의 의무감 뒤에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내 그림자가 있었다.

책은 그 그림자를 정확히 건드렸다.
나우웬은 말한다.
진짜 치유는
상처 없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솔직히 인정한 사람이 흘려보내는 은혜라고.

그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우리는 늘 상처를 부끄러워하고,
그 상처를 극복해야만 치유자가 될 수 있다고 믿지만
나우웬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상처는 치유자의 결격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깊고 온전한 통로라고.

나는 그 문장을 읽고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감정을 숨긴 채 살아왔는지
조금씩 돌아보게 되었다.
상담을 해도,
사역을 해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내 상처를 꺼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의 아픔을 듣는 사람이지
내 상처를 고백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은 말한다.
상처 없는 치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상처를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상처 입은 영혼 옆에 함께 앉을 수 있다고.
상처는 나를 무너뜨리는 이유가 아니라
나를 사람 옆에 앉게 하는 힘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내 상처가 사역의 결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언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상처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그 상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

책의 또 다른 부분에서
나우웬은 치유자의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사람을 돕는 일은 현실적으로
많은 때에 외로운 일이다.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이 쌓이고
자신의 감정은 뒤로 밀어두면서
누군가의 삶을 떠받치는 일이 반복될 때
어떤 깊은 외로움이 찾아온다.

그 외로움이 죄책감과 연결되기도 한다.
“나는 더 잘해야 한다”
“나는 약해지면 안 된다”
“나까지 흔들리면 안 된다”

나는 그 외로움 안에서
오래 버티는 법을 배워 왔지만
그 외로움이 나를 갉아먹고 있다는 건
알면서도 외면해 왔다.

책은 그 외로움을
치유자가 반드시 지나야 하는 중요한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외로움은 치유자가 되는 길에서
피해야 할 위험이 아니라
거쳐야 할 내면의 신비라고.

나는 그 말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천천히 곱씹어 보니
상처를 통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다면
외로움은 나를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데려가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외로움은 나를 비우고
그 비움의 공간에서
하나님의 위로가 스며드는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나는 그 말에 머물렀다.
내가 피하려 했던 감정들이
실은 하나님께 가장 솔직해지는 통로였다는 것을
이 책은 묵묵히 알려주고 있었다.

나우웬이 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는
상처가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붙잡고 싸우면서도
그 상처가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언어가 된 사람이다.

그 말은 희미한 위로가 아니라
치유가 무엇인지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다.
치유는 ‘완전한 사람’이 주는 선물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 흘려보내는 사랑이라는 것을
책 속 문장들은 조용히 일깨워주고 있었다.

나는 이 책이 단순한 영성 에세이가 아니라
내 삶의 중요한 장면을 다시 읽게 해주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내가 해왔던 돌봄,
내가 감췄던 상처,
내가 견뎌온 외로움,
그리고 내가 잃어버렸던 나의 내면.

책을 읽는 내내
하나님은 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천천히 어루만지고 계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손길 앞에서
오랜 시간 묻어두었던 상처들이
조용히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책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니
나우웬이 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이
단순히 상처와 치유의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더 큰 질문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상처가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한 과거일 수 있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고통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때
하나님이 그 고통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을
너무 조용하게,
그러면서도 참된 울림으로 설명한다.

나는 그 대목에서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누구나 자기 상처가 사용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상처는 숨기고 싶은 것,
가능하면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
정리해 두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우웬은
상처가 어떤 순간에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아름다운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내 안에서 오랫동안 굳어 있던 관념이
부드럽게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나는
상처를 없애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우웬은
상처 있는 사람이라도
아니, 상처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고통 옆에 함께 앉아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마치
상처가 자격이 될 수도 있다는
뒤집힌 듯한 위로를 품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상처를 숨기느라 애를 썼다.
스스로 단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고
누군가를 도우려면
약한 모습은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인정하는 일은
나에게 너무 취약한 행동 같아서
가능하면 마음 깊은 곳으로 밀어 넣어두려고만 했다.

그러나 책은 그런 내 방식을
조용히 비추었다.
빛이 어둠을 들추듯
나우웬의 문장은
내가 스스로를 다루어 온 방식을 보여주었고
그 방식이
나를 얼마나 지치게 만들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누군가를 돕는 역할을 하면서도
정작 내 상처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
누군가가 아프다고 말하면
나는 그 아픔 옆에 앉아줄 수 있었지만
나 자신의 아픔에는
끝까지 눈을 돌리고 싶어 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내 상처를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그 상처가 너무 깊고
너무 오래된 것처럼 보여서
건드리면 무너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상처 입은 치유자』는 말한다.
상처는 무너짐의 원인이 아니라
은혜가 스며드는 틈이라고.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고
그 빛은 나의 어둠을 정죄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어둠 속에 함께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낸다고.

나는 그 말이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가슴에서는 더디게 내려오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천천히 숨을 고르고
문장을 읽고 또 읽게 되었다.

책의 한 장면에서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가진
독특한 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능력은
상처 없는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이 어떤 결로 가슴에 스며드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프다고 말할 때
그 말이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서 튀어나온 신음이라는 것을
상처 입은 치유자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인식은 지식에서 오지 않는다.
그 인식은
자신도 그런 신음을 내본 적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인간적인 공명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왜 특정 단어들에 유독 더 깊이 반응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종종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지만
그 말 뒤에는
오래 찬 상처가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는 그 상처에
이유 없이 마음이 아려왔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이유가
나에게도 비슷한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우웬은
치유자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현존’이라고 말한다.
상처를 속으로 감춘 채
지식으로만 사람을 돕는 사람보다
상처를 가진 채
그 자리에서 함께 머물러 주는 사람이
더 큰 위로가 된다고 말한다.

그 말은
나에게 깊은 위안을 주었다.
나는 종종
내가 잘 해내고 있는지
정상적으로 돌보고 있는지
의무적으로 확인했던 시간들이 있었는데
정작 사람들은
내 말보다
내 ‘함께 있음’을 더 필요로 했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완벽한 위로를 주지 못해도 괜찮았다.
언제나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사실은
누군가 옆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상처 입은 사람에게는
이미 큰 위로가 된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내 마음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책에서 나우웬은
우리가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상처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상처를
그저 감정적인 소모로 흘려보내지 않도록
하나님의 시선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상처를 내 방식대로 다루려 하면
그 상처가 다시 나를 가두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 정직함이
치유의 시작이자
사역의 핵심이다.

나는 이 말이
마음에 가장 깊게 남았다.
‘정직’이라는 단어.
누구를 향한 정직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정직,
그리고 내 마음을 향한 정직.

나는 하나님 앞에서조차
내 상처를 제대로 꺼내본 적이 많지 않았다.
기도를 해도
항상 사람들을 위한 기도나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기도만 했지
정작 내 상처를 들고
하나님께 조용히 앉아 있었던 적은 많지 않았다.
그 부분을 인정하는 순간
묘한 울림이 마음을 지나갔다.

상처는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야
비로소 치유의 시작이 된다.
그 상처를 다루는 분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과한 치유자만이
누군가의 상처 옆에서
불필요한 조언이나
성급한 해결책 대신
같이 머물러 줄 수 있다.

책이 여기서 말하는 치유란
해결이 아니라 동행이다.
위로란
설명이 아니라 ‘현존’이다.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감정을 정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함께 있어주는 신비다.

나는 그 사실을
책의 문장 하나하나를 통해
다시 배우고 있었다.


나우웬이 말하는 치유자의 여정에는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피하지 않는 용기다.

그 용기는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힘겹고 독한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상처를 억지로 밀어붙여서 직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를 바라볼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순간을 기다리는 용기,
그리고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조용히 서는 태도에 가깝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과거 어느 시기에
나도 그 용기를 잃어버린 적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내 상처를 마주하는 것이
너무 버거워
아예 ‘없는 것처럼’ 살아가려고 했다.
겉으로는 누군가를 돕고 있었지만
정작 내 내면에서는
아무도 만져줄 수 없는 고통이
천천히 굳어지고 있었다.

그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나우웬은 그 믿음이
얼마나 얕은 착각인지 정확히 짚어낸다.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절대로 저절로 치유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심히 방치하면
상처는 더 깊어지고
더 큰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사람을 돕는 자리에서
불쑥 자기 얼굴을 드러낸다.

나는 사역이나 상담의 자리에 있으면서
내 상처가 누군가의 말 때문에
갑자기 들려 오듯 올라오는 경험을
여러 차례 했다.
그 순간에는
상대의 아픔보다
내 아픔이 먼저 반응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내가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책을 읽는 동안 서서히 드러났다.

나우웬은 말한다.
“치유자의 상처는
그가 다른 사람의 상처에 민감해지는 이유일 뿐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길이 된다.”

이 말을 읽고
나는 잠시 책을 덮었다.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생각났다.

나는 상처가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자격을 잃는다고 믿었다.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나는 더 무가치한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런 나는
누군가를 돕는 자리에서
점점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우웬은
상처 때문에 ‘자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차이는 너무 컸다.
상처가 죄책감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마음으로 알 것 같았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는 것은
상처를 glorify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상처를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리에서 다루는 것,
그 자리 자체가 은혜라는 뜻이다.

책은 이어서
동시대인의 정신적 외로움에 대해 말한다.
나우웬의 시대와 오늘의 시대가
그리 다르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의 외로움의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인이 가진 외로움이
겉으로 보기에는
바쁜 일상 속에서 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주장을 읽으며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우리는 바쁘다.
많은 관계가 있고
많은 정보가 있고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연결—
하나님과의 연결,
자기 마음과의 연결—
이 두 가지가 끊어진 채 살아간다.

그래서 언제나
조용한 외로움이 마음속에서 흐르고 있다.

나우웬은 이 외로움을
치유자가 먼저 정직하게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치유자는 외로운 사람들을 돕는 자이지만
그 외로움이 얼마나 두려운 감정인지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은
나의 외로움을
쓸데없는 감정으로 보지 않게 만들었다.
그 외로움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다면
그 외로움은 나의 결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부르는 신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가장 머물게 만든 부분 중 하나는
“미래의 환상에 갇힌 사람”에 대한 설명이었다.
나우웬은
사람들이 현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허황된 미래의 가능성에 기대어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미래는
끝없는 허상에 가깝고
현재의 상처를 마주하는 용기가 부족한 데서 오는
일종의 도피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나 역시 ‘미래’를 핑계 삼아
현재의 상처를 피한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떠올랐다.

“이 시기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조금 더 성장하면 상처가 잊혀질 거야.”
“조만간 새로운 기회가 오면 지금의 어려움도 다 의미가 생기겠지.”

나는 미래의 가능성을 붙잡으면서
현재의 자신은 보지 않으려 했다.
그런 나의 태도를
나우웬은 조용히 비춘 것이다.

상처는 미래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상처는 현재에서만 마주할 수 있다.
그 현재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손을 대기 시작할 때
비로소 치유의 은혜가 흐른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핵심은
바로 이 ‘현재성’에 있다.
치유자는
과거에 머물지도 않고
미래의 환상에 도피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지금 함께 계신 이 자리,
내가 숨 쉬는 이 순간에서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상처가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본다.

책을 읽으며
나는 수없이 숨을 골랐다.
마치 오래된 마음의 먼지가
조금씩 걷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처가 더 이상
부끄럼의 흔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는 자리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우웬은
우리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
먼저 ‘자기 부정’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기 수용’을 말한다.
자기 부정은
내 상처를 없애려는 시도고
자기 수용은
내 상처를 하나님께 드러내는 태도다.

이 차이는
상처를 다루는 방식 전체를 뒤흔든다.

결국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 위로 흘러들어오는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신뢰가
치유의 진짜 시작이라고 믿게 되었다.
내가 상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루신다는 믿음.
내가 치유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분이라는 고백.
나는 그저
그 치유의 자리에 ‘함께’ 서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부르심의 핵심이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나우웬이 묘사하는 ‘현존의 힘’이
왜 중요한지 조금씩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는 치유는
결코 화려하지 않다.
거창한 사역도 아니고
놀라운 능력도 아니다.
수많은 말과 설명으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치유의 핵심은
“함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 자리에 머물러 주는 것.
도망치지 않는 것.
상대의 침묵을 견디는 것.
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 고통 옆에서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이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
나는 책을 읽으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현대인은
상대의 고통과 마주하는 것을 버겁게 느낀다.
왜냐하면 상대의 고통이
내 고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남의 상처를 듣다가
자신의 상처가 들려오는 순간,
사람은 본능적으로 회피하고 싶어진다.
‘이 감정을 건드리고 싶지 않다’
‘내가 흔들릴 것 같다’
‘감당할 자신이 없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거리 두기를 선택한다.
하지만 나우웬은
그 순간이야말로
치유자가 될 기회라고 말한다.

상대의 고통과 내 상처가 연결되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두 사람 모두’를 향해
은혜의 문을 여신다.
치유는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서 상호적으로 일어나는 신비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며
나에게 오래 이야기했던 날이 있었다.
그 사람의 목소리는 떨렸고
손은 차갑고
말을 끝맺을 때마다 숨을 고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내 상처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때 나는
무언가 말해줘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음이 불편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사람의 고통이 너무 버거워
한동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 자체를 피하기도 했다.

그런데 『상처 입은 치유자』에서
나우웬은 그 감정을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고통은
결코 가볍지 않다.
타인의 고통과 맞닿는 순간
자신의 상처도 흔들리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고통을 피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흔들림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치유자의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이
꼭 나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치유자는 흔들릴 수 있다.
흔들리는 순간
오히려 더 깊은 공감이 생기기도 한다.
흔들린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이며
그 인간성이
치유의 중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우웬은 알려주고 있었다.

책은 계속해서
“영적 돌봄”의 본질을 설명한다.
영적 돌봄은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기도문을 대신 외워주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조언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 돌봄의 핵심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깊이 들으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상처와 진실한 마음을
스스로 고백하도록 돕는 것이다.

치유자는
해결사가 아니다.
중재자도 아니다.
상대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존재도 아니다.
치유자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시선’을 비춰주는 창문 같은 존재다.
그 창문이 열릴 때
그는 자기 안에 숨겨진 상처를
조금 더 부드럽게 바라볼 수 있고
그 바라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드는 순간이 된다.

나는 이 설명을 읽고
사람을 도우려던 내 방식이
얼마나 많은 오해와 착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때때로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너무 앞서 나갔다.
상대가 말하는 속도보다
내가 결론을 내리는 속도가 더 빨랐고
그 과정에서
상대의 침묵을 견디지 못해
불필요한 조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진정한 치유는
조언의 정확도가 아니라
침묵의 품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나우웬은
영적 돌봄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는
“자기 내면의 빈자리와 화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빈자리는
약점이나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공간이다.
내 안의 빈자리,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
그 한계의 자리를 인정할 때
나는 비로소
다른 사람의 공허함 옆에
같이 앉아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공허함을 두려워한다.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우웬은
공허함이 채워져야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 공허함을 하나님께 드리는 그 자리에서
은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기도할 때 느껴지는 어떤 깊은 공백이
사실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기도할 때
말이 나오지 않을 때가 있다.
기도문도 떠오르지 않고
상처는 너무 무겁고
감정은 복잡하고
하나님 앞에서 너무 작아져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순간들.

그런 순간이
나는 오래 전에는 실패라고 느꼈다.
기도가 안 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 침묵은
하나님이 들으시는 소리였다.

그 침묵 속에서
내 상처는 조금씩 드러나고
내 마음은 하나님 앞에서
말보다 깊은 진실을 고백하고 있었다.

나우웬이 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란
기도가 능숙한 사람이 아니라
기도의 침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공허함이 하나님께 비춰지는 그 순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는 공간으로
자신의 상처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 책이 단지 ‘위로’의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인간의 상처를 통해 일하는지
아주 본질적인 통찰을 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책은 후반부에서
‘환대(Hospitality)’의 개념을 매우 깊게 다룬다.
환대는 단순히 친절하거나
섬세하게 배려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맞아들이는 영적 공간이다.

환대는 “당신이 틀렸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환대는
그 사람의 상처와 혼란 그대로를 맞아들이며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는 태도다.

이 설명은
내가 오랫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목회적 돌봄의 핵심을 풀어주었다.

나는 그동안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마음속에서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말을 찾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환대는
그런 계산을 멈추는 것이다.
환대는 판단을 멈추고
해석을 멈추고
‘고쳐야 한다’는 압박을 멈추는 것이다.

환대는
“내가 너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조용한 선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동안 숨을 길게 쉬었다.
누군가를 돕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나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적이 있었나.
아니면
‘대답할 준비’만 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나우웬은
준비가 다른 곳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은 환대는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조언이나 해결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향한 깊은 환대,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열린 공간이다.

나는 이 부분이
치유의 본질을 설명하는 가장 핵심 대목이라고 느껴졌다.

치유는 능력이 아니라 공간이다.
그 공간은
상처 입은 사람이기에 만들 수 있다.
내 상처가 나를 무너뜨렸던 경험이 있을수록
나는 누군가의 무너짐 앞에서
섣불리 그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있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함께 있음이
치유의 시작이 된다.


책의 후반부로 들어갈수록
나우웬이 던지는 질문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는 단순히 ‘치유자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자나 상담자, 혹은 누군가의 마음을 돌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는 내면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들 앞에서
피하고 싶었던 마음의 그림자를
여러 번 마주해야 했다.

그중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소진’이라는 단어였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언뜻 보기에는 고귀하고 의미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사용한다.
특히 자신의 상처가 아직 충분히 치유되지 않은 상태라면
다른 사람의 고통은
이해가 아니라 부담으로 다가오기 쉽다.

나우웬은 이 지점을 정확하게 짚는다.
사역자가 지치고 무너지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괜찮아야만 한다.”
“나는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나는 버텨야 한다.”

이런 신념은
겉보기에는 성실하고 헌신적인 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명령이다.
그 명령은 어느 순간 사역자의 영혼을 지치게 만들고
결국에는 돌봄의 마음 자체를 닳게 만든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며칠을 곱씹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다 내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우웬은
“당신의 영혼이 지쳐 있을 때
그 피로를 무시한 채 섬기면
그 섬김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문장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나는 그동안
섬김과 소진을 구별하지 못했다.
나는 남을 위해 쓰이면 쓸수록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때로는
지쳐 있는 마음으로 하는 헌신이
진짜 헌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우웬을 통해 처음 깨달았다.

책은 계속해서
사역자가 겪는 특유의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이 외로움은
관계가 부족해서 생기는 외로움이 아니라,
모두를 돌보는 자리에서
정작 자신은 고백할 대상이 없을 때 생기는 외로움이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도움을 요청하지만
정작 자신은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위치에 있을 때
그 고독은 너무 깊어진다.

나우웬은 그 외로움의 본질을
“영혼의 방치”라고 표현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아주 오랫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정확하게
내 마음 한가운데를 짚어내는지.

누군가의 아픔을 듣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나는 나 자신의 아픔을 말하는 데
더 서툴러졌다.

말하지 않다 보니
고통은 고통 안에서 고립됐고
그 고립은
나도 모르게 외로움이 되어 쌓였다.
남을 돕는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자신의 마음은 뒷순위로 밀리고
마침내는
‘나는 괜찮다’는 착각 속에 숨게 된다.

하지만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마음 한 구석이 이유 없이 공허해지고
그 공허함이
기도조차 나오지 않는 침묵으로 이어진다.

나우웬은 말한다.
그 침묵을 ‘망가짐’으로 보지 말라고.
그 침묵 속에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부르시는
은밀한 초대가 있다고.

나는 이 부분을 읽을 때
마치 하나님께서
내 무너진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오래 전부터 조용히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은
묘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책의 어느 구절은
아주 짧았지만
오랫동안 머물게 만들었다.

“진정한 치유는
희망의 언어를 말할 수 있을 때 시작된다.”

희망의 언어라는 표현이
참 인상 깊었다.
희망은 낙관도 아니고
긍정적인 말로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아니다.
희망은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소리를
작게라도 들을 수 있을 때 생겨난다.

희망의 언어는
“괜찮아질 거야”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전히 함께 계신다”라는 고백이다.

나는 이 말을 떠올리며
내가 지나온 시간들을 비춰보았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도
나는 스스로를 붙잡으려고 했고
힘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희망은
내 의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희망은
하나님이 나를 손으로 쓸어주시는 것처럼
어느 날 조용히 찾아오는 것이었다.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의 부르심”을 설명하면서
희망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관계’라고 말한다.

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그분의 시선 안에서
내 상처가 의미를 얻는 순간
희망이 태어난다고 한다.

그 말은
내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

치유는
상처가 사라졌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가진 채로
하나님의 시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작된다는 것.
그래서 치유자는
무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을 아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 시선을 알고 있기에
다른 사람에게도
그 시선을 전할 수 있다는 것.

희망이라는 것이
새로운 관점으로 다가왔다.

책 후반부에서
나우웬은 ‘부르심’에 대해 말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의 일이 아니라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서는 사람이
이미 치유자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나는 이 말을
한동안 마음속에서 굴려보았다.

진실함.
그 단어가
생각보다 더 깊은 울림을 남겼다.

사람들은 진실함을
솔직함 정도로 생각하곤 하지만
나우웬이 말하는 진실함은
그보다 훨씬 더 내면적인 의미다.

진실함은
자신의 상처를 감추지 않는 태도다.
상처를 있는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내며
그분이 만져주시길 기다리는 시간이다.
그 기다림은 때로 길어지고
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기다림 자체가
하나님의 손길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증거라고
나우웬은 말한다.

나는 이 구절에서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기도의 시간이 떠올랐다.
말이 이어지지 않아
그저 눈을 감고 있었던 날.
하나님 앞에 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날.
그날은
기도가 실패한 날이 아니라
기도의 본질에 가장 가까웠던 날일지도 모르겠다.

기다림은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믿음의 행위였다.

지금 돌아보면
상처는 하나님께서 내 삶에 쓰시는
가장 부드럽고 깊은 언어였다.

그 언어가
누군가의 상처 옆에 앉을 수 있는 마음을 만들었고
그 마음이
조용히 사람을 살리는 자리가 되었다.

나우웬이 말하는 치유자는
상처를 극복한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품고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그 정의 속에서
어떤 자유를 발견했다.

내가 완벽할 필요가 없다.
내가 흔들려도 괜찮다.
내가 상처를 여전히 안고 있어도
하나님은 그 상처를 통해
누군가에게 다가가실 수 있다.

그 사실이
나를 조금 더 숨 쉬게 만들었다.


책의 마지막 장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여러 번 페이지를 넘기지 못한 채
그 문장들 위에 오래 머물렀다.
나우웬의 글은
머리로 읽는 글이 아니라
마음으로 천천히 녹여야 하는 글이었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가
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오랫동안 눌러놓았던 마음의 감정들이
조심스레 표면으로 떠올라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차오르는 경험을 했다.

특히 그는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다”라는 확신을
너무나 따뜻하게,
그리고 너무도 단호하게 말한다.

이 말은
내게 결정적인 해방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아픈 상태에서는
남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치유되고 나면,
이 상처가 해결되면,
내가 조금 더 괜찮아지면,
그때서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한다.

하지만 나우웬은
그 조건이 완전한 착각이라고 말한다.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상처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이 땅의 누구에게도 오지 않는다.
만약 치유가 조건이라면
아무도 누구의 치유에도 쓰임 받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상처 입은 사람을 통해
다른 상처 입은 사람을 찾아가신다.
상처는 결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진리가
어쩌면 기독교적 돌봄의 본질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나우웬의 글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너의 상처가 너를 자격 밖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처가 너를 부르심의 자리로 데려간다.”

이 문장을 읽는 동안
가슴이 묘하게 뜨거워졌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늘 느끼던 부담과 미안함,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할 때마다
느껴졌던 자기 의심이
천천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가진 상처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 그 지점을 사용하고 싶어 하시는 이유였다.

그 사실이
나는 너무 놀라웠고
동시에 너무 위로가 되었다.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선지자적 사명’에 대한 설명은
특히 강한 인상을 남겼다.
나우웬은
상처 입은 치유자는
결국 선지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현재에 드러내는 사람이고
그 마음을 사람들에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전하는 사람이다.

선지자의 사명은
언어로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자체를 통해 흘러나온다.
상처를 가진 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
그 삶이 곧 메시지가 된다.

나는 이 말을 오래 곱씹었다.

누구나 말로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상처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깊이 위로할 수 있다.

위로의 깊이는
경험의 깊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나는 여러 해 동안
기억하지 않고 살았다.

언젠가 한 후배가
오랜 고민 끝에
내게 마음을 털어놓았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의 아픔을 정말 깊이 느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과거의 상처가
그의 상처와 조용히 연결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어떤 조언도 떠오르지 않았다.
책에서 읽은 문장도 없었고
설교에서 들은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마음 한 가운데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도 그런 시간 있었어.
그리고 그 시간을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셨어.”

그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그 후배는 오랫동안 울었다.

왜 그럴까.
내가 놀라운 지혜를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의 출처가
내 상처 깊은 자리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상처는
사람을 닫게도 하지만
사람을 열리게도 한다.
상처가 성숙해지면
그 상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장 따뜻한 다리가 되기도 한다.

나는 『상처 입은 치유자』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상처는 숨겨야 할 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흘리기 위해
뚜껑을 열어두신 통로라는 사실.
그 통로를
누군가는 ‘부끄러움’이라고 부르지만
하나님은
그 통로를 ‘부르심’이라고 부르신다는 사실.

그 깨달음은
내 삶을 조금씩 바꿔놓았다.
나는 누군가를 도우면서도
이제는 더 이상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흔들려도 된다.
약해도 된다.
상처를 갖고 있어도 된다.
하나님은 그 상처를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떡 한 조각,
물 한 잔이라도 나눌 수 있는
은혜의 자리를 만드실 수 있다.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각자의 상처를 피할 방법이 없다.
누구는 관계에서 상처받고
누구는 가족 안에서 깊은 흉터를 남기고
누구는 실패와 실수에서
오랫동안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상처를 안고 산다.

그러나 나우웬은
그 상처를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그 상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은밀한 언어’이고,
그 언어로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나는 책을 덮으며
오랜 시간 깊은 숨을 쉬었다.
마치 마음 한쪽에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이
조용히 열리는 느낌이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표현은
더 이상 비극이 아니었다.
그 표현은
은혜의 다른 이름이었다.

상처는 나를 약하게 만들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약함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은혜의 흔적이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의 문이 될 수 있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나는 문득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가 가진 상처를
숨기지 않게 해주세요.
그 상처를 통해
누군가의 마음에
당신의 위로가 전해질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사용되어지길 원합니다.”

그 기도 속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소망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이 나의 상처를
그분의 일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조심스레 피어오르고 있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단순한 책이 아니었다.
이 책은
내 삶에서 가장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하나님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속삭임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너의 상처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 상처는 이미
내가 일하기 시작한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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