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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제작한 용서가 안 되는 마음, 하나님은 어떻게 회복시키시는가 팀 켈러 Forgive 책 리뷰 포스팅 글의 대표 썸네일 입니다

Forgive: Why Should I and How Can I? – 상처를 붙들고 살아온 마음을 내려놓는 법

나는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부터 마음이 조금 조심스러웠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문제는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고,
특히 한국 사회와 문화 속에서는
“용서하라”라는 말 자체가 때때로 상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용서라는 주제는 흔히 말하는 윤리적 명령이나 신앙적 책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용서의 문제는 언제나 깊은 상처, 무너진 관계, 오래된 아픔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라는 말이 오히려 고통을 더 강하게 밀어붙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팀 켈러의 이 책은 시작부터 그런 단정적인 명령이나
얕은 위로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용서가 얼마나 복잡한지,
얼마나 섬세한 과정이 필요한지,
그리고 ‘왜 용서가 때때로 불가능해 보이는지’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방식으로 글을 열어간다.
이 정직함이 독자의 마음을 방어적으로 만들지 않고
조금씩 마음을 열게 한다.
읽는 동안 내가 경험한 감정은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구나”라는
묘한 안도감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케러가 용서를 단순한 감정 문제나
종교적 덕목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는 용서를 하나의 ‘관계적 현실’로 본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며,
그 상처를 부정하거나 빠르게 잊으려고 하는 시도는
결국 마음 안에 더 큰 부담을 낳는다는 사실을
그는 여러 사례와 철학적·신학적 분석을 통해 보여준다.

케러는 용서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상처가 주는 실제적 고통’을 충분히 인정해준다.
이 과정을 생략하지 않은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이라고 생각했다.
용서는 고통을 정상화하거나
상처를 축소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상처를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그 상처가 내 안에서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천천히 이해하는 과정에서만
진짜 용서가 가능해진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과거의 여러 관계가 불쑥 떠오르곤 했다.
깊이 친했던 사람과의 오해,
말 한마디에 마음이 다쳤던 일들,
가족에게 받았던 상처,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갔던 사건들.
그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무뎌졌다고 생각했지만
책의 문장 하나하나가 닿을 때마다
마음 안쪽에서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팀 켈러가 강조하는 핵심 중 하나는
“용서는 부정이 아니라 직면이다”라는 점이다.
용서는 상처를 모른 척하거나
감정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충분히 인정하는 순간부터
용서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 진실은 너무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가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이었다.

한국의 문화적 특성 때문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성숙함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
특히 분노나 슬픔 같은 부정적 감정은
가능한 빨리 덮어두거나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켈러는 이 책 전반에서 말한다.
감정이 억눌린 상태에서는
용서도, 치유도, 관계 회복도 일어나지 않는다.
감정을 억누른다는 것은
마치 불이 난 방에 이불을 덮어버리는 것과 같다.
보기에 잠시 괜찮아 보여도
이불 속에서는 더 큰 불길이 번져나간다.

케러는 이 지점을
심리학적 언어와 신학적 통찰을 모두 활용해 설명한다.
그는 인간의 감정 구조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것이라고 말하며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더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설명은 신앙적 부담으로 인해
감정을 ‘부정의 대상으로만 여기던 사람들’에게
큰 해방감을 준다.
용서를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감정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직면하는 것이다.

책의 중반부로 들어가면서
케러는 본격적으로
“왜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한다.
이 부분은 신앙의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책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가 제시한 이유는 단순히
“성경이 용서하라고 하니까”가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이유는
훨씬 더 관계적이고, 사회적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는
용서가 상처를 더 이상 확장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상처를 받은 마음은
반발하고 싶고
보복하고 싶고
상대에게 같은 고통을 돌려주고 싶은 충동을 만든다.
케러는 이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그 감정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그 감정을 그대로 따르게 되면
‘고통의 악순환’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상처는 상처를 낳고
미움은 더 큰 미움을 낳으며
결국 관계뿐 아니라 공동체까지 무너진다.
이 악순환을 멈추는 유일한 방법이
용서라고 그는 설명한다.

두 번째 이유는
용서는 ‘내 마음을 다시 자유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그 상처는 오랫동안 마음을 지배하고
삶의 여러 곳에 영향을 미친다.
생각보다 깊게 우리를 옥죄기 때문에
과거의 상처가 미래의 평화를 훼손하는 일이 생긴다.
케러는 이 지점을 매우 설득력 있게 묘사한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상대에게 묶여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나 용서는
그 묶임의 고리를 끊고
내 마음을 다시 나에게 돌려주는 과정이다.

나는 이 표현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용서는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

세 번째 이유는
용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관계 속으로 흘러가게 만드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결국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과정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케러는 이것을
“복음의 진짜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용서의 가능성 안으로 들어간다.

책을 읽으며 나는
하나님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실수를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이 인식이 용서의 출발점이 되었다.


케러가 제시하는 용서의 의미가 점점 더 분명해질수록
용서가 얼마나 ‘영혼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인지’가 느껴졌다.
용서는 단순한 결정이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이며
내면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감정의 무게를 다시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켈러는 이 책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말한다.
용서는 빠르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천천히 숨을 고르며 걸어가는 여정이라고.

이 지점에서 켈러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매우 정교하게 분석해낸다.
그는 “요즘 사회는 용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말한다.
SNS와 온라인 문화,
개인의 자율권과 피해 의식,
그리고 공동체의 해체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더 쉽게 상처를 주고
더 깊게 오해하고
더 빠르게 관계를 끊어버리며
용서의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의 분석은 놀라울 만큼 한국 사회와도 닮아 있었다.

한국의 온라인 문화는 감정이 빠르게 번지고
한 번 누군가가 잘못한 것이 드러나면
집단적 분노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용서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는
종종 ‘상처받은 사람을 외면하는 태도’로 오해받는다.
그래서 “용서하자”라는 말 자체가
예민하게 들릴 때가 많다.

케러는 이 현상을
“분노의 문화”라고 진단한다.
사람들이 상처를 드러내고
정의를 요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용서를 완전히 배제하게 되면
사회는 끝없는 분열을 반복한다고 말한다.
그는 용서를 정의와 분리하지 않는 독특한 균형을 제시한다.
“용서는 정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다.”
이 말은 지금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라고 느꼈다.

한국 사회에서도
혐오와 분열의 언어가 더 흔해지고
상대방의 잘못을 ‘완전히 부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기곤 한다.
케러의 메시지는 이런 시대적 기류 속에서
용서가 얼마나 잊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공간을 회복해야
개인도 공동체도 다시 건강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의 중반부로 들어가면
케러는 이제 두 번째 질문,
“그렇다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로 나아간다.
그는 용서가 추상적 명령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해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과정을 제시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방법론’이라기보다는
마음의 깊은 움직임을 천천히 따라가는
영혼의 안내서에 가깝다.

첫 번째 단계는
상처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 단계는 용서의 모든 시작점이 된다.
상처를 부정하거나
억누르거나
합리화하거나
잊어버리려고 하는 마음은
용서의 길로 갈 수 없다.
상처는 언제나 말해야 하며
인정되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놓여야 한다.
케러는 말한다.
“상처를 모른 척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상처를 정확히 보는 사람이 용서한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상처를 덮어두는 것이
성숙한 반응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괜찮은 척 하는 것이
더 강한 태도라고 오해했다.
하지만 책은 그런 방식이
내 감정을 압축시키고
결국 더 큰 파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처를 직면하는 용기가
용서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두 번째 단계는
내가 느끼는 분노와 감정의 무게를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켈러는 ‘탄식’이라는 개념을 다시 꺼낸다.
그는 용서를 배우려면
먼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용서는 억눌린 감정 위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이
가장 치유적인 과정이며
그때 비로소 마음의 독이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감정을 숨기고 살았는지 깨달았다.
강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픔을 조용히 묻어두었던 경험들,
누군가에게 실망했다고 말하면
관계가 더 멀어질까 두려워
감정을 말하지 못한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마음 안에서는
작은 분노와 슬픔이 쌓여갔고
그 감정들이 관계의 틈을 만들었다.

케러는 이 과정을 피하지 말라고 말한다.
감정을 하나님께 드러낼 때
그 감정은 하나님 안에서 처리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며,
우리의 분노를 정죄하지 않으신다.
그 분노와 슬픔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더 깊은 이해와 자비로 이끄신다.

세 번째 단계는
보복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이 단계는 용서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상처받은 마음에는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정의를 세우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때로는 상대에게 같은 고통을 돌려주고 싶은
정직한 분노가 있다.
케러는 이런 감정들이 ‘불신앙’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심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말한다.
“정의를 바로 세우는 마지막 권리는 하나님께 있다.”

이 말은 상처받은 사람에게
모욕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켈러는
‘내가 복수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성경적·심리적·관계적 관점에서
차분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복수의 마음은 나를 더 깊이 속박하고
그 감정에 집착하게 만들며
결국 상처의 사건을
계속해서 반복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보복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순간
영혼은 오랫동안 눌려 있던 무게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하나님이 정의를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네 번째 단계는
상대의 인간성을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이 단계가 가능해지는 순간
용서는 드디어 ‘감정의 문턱’을 넘는다.
상대방을 상처 준 행위로만 규정하지 않고
그 사람의 한계, 성격, 배경, 취약함,
그가 겪었던 슬픔을 조금씩 떠올리는 일이
용서의 감정적 공간을 만든다.
이것은 상대를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행동 뒤에 있는 ‘인간성’을 보는 것이다.

책은 말한다.
“용서는 사랑의 감정을 즉시 회복하는 일이 아니다.
상대의 인간성을 회복해주는 일이다.”
이 말은 복음의 중심과도 닿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보다
우리의 존재를 먼저 보셨기 때문이다.

이 과정들은 결코 빠르게 지나갈 수 없다.
케러는 용서를 하나의 ‘감정적 사건’이 아니라
‘영혼의 형성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용서는 하나님께 다시 배우는 마음이며
하나님의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근육을
천천히 길러가는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용서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 단계는 ‘감정의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제 관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친절,
조심스러운 대화,
보복하지 않겠다라는 작은 선택,
말을 아끼는 마음 같은
작은 행동들이 용서를 완성해간다.
용서는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행동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실재가 된다.


케러가 설명하는 용서의 다섯 번째 단계는
용서를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일이다.
이것은 책을 읽으면서 가장 깊게 공감한 부분 중 하나였다.
용서는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
어떤 상처는 너무 깊어서,
어떤 기억은 너무 날카로워서,
하루아침에 모든 감정이 사라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케러는 용서를 ‘단발적 선언’이 아니라
‘지속적인 선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감정은 즉시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서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이다.”

나는 이 문장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감정으로 시작되는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이 먼저 세워질 때
감정은 천천히 따라온다는 의미였다.
감정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진실을 먼저 선택하고
그 선택을 하루하루 반복하면서
감정이 그 뒤를 따라오도록 기다리는 것.
이 방식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이었다.
용서는 감정적 완성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 순종에서 출발한다는 사실,
이 진실이 내 마음을 깊게 흔들었다.

케러는 이 단계에서
‘용서의 반복’이 작은 출혈을 멈추게 하고
영혼의 상처가 조금씩 닫히는
아주 현실적인 치유의 리듬을 만들어 준다고 말한다.
그는 감정을 억지로 ‘좋아지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
감정은 억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선택”
이것 하나만을 꾸준히 붙잡아 나갈 것을 말한다.
그 선택이 쌓일 때
마음의 독이 빠져나가고
상대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내면의 긴장이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이전에 했던 여러 ‘절반짜리 용서’를 떠올렸다.
말로는 “용서했어”라고 했지만
감정은 여전히 상처 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순간들.
그때 나는 ‘용서가 안 되는 것’처럼 느꼈지만
실은 내가 감정이 변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용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분명하게 느꼈다.
용서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방향의 문제였다.

케러는 이어서
용서가 우리 삶에 가져오는 변화들을 다룬다.
여기서부터 책은 단순한 이론이나 원리 설명을 넘어서
독자가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영적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 변화들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읽으면서 저절로 공감이 되었다.

첫 번째 변화는
분노의 에너지가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상처를 받을 때
우리의 마음은 강한 감정적 에너지를 갖게 된다.
그 에너지는 종종
분노, 원망, 씁쓸함, 서운함, 냉소 같은 방식으로 드러나며
삶의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감정은 절대 고립된 영역에서 머물지 않는다.
분노는 관계를 건드리고,
자존감을 건드리고,
일상적인 판단과 행동에도 스며든다.

하지만 용서를 선택하는 과정이 반복될수록
그 감정적 에너지는 맥을 잃고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용서가 기적처럼 당장 마음을 비워주는 것은 아니지만
분노를 붙들고 있던 손아귀가
조금씩 열리고
결국 풀려나는 것이다.
이 변화는 사람이 부드러워진다는 말과 같다.
삶이 더 유연해지고
관계가 덜 경직되며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더 따뜻해진다.

두 번째 변화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용서는 타인을 위한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을 깊게 성찰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용서의 과정에서
나는 나의 연약함, 한계, 상처,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진실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이 만남은 때로는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자비를 만든다.
나 자신을 조금 덜 비판하게 되고
조금 더 부드럽게 바라보게 되며
하나님을 더 깊이 의지하게 된다.
용서의 과정은
자기 자비(self-compassion)를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세 번째 변화는
관계 속에서 감정이 더 정직해진다는 것이다.
용서를 배우면
상대에게 자신의 감정을 더 솔직하게 말하게 된다.
‘괜찮은 척’하거나,
‘스스로 감정을 삼키는 방식’으로
문제를 넘기던 방식에서 벗어나
관계에서 건강한 대화를 시도하는 용기가 생긴다.
감정을 말한다고 해서
관계가 무조건 좋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을 숨기는 방식은
언젠가 반드시 상처를 더 크게 만든다.
용서를 배우는 사람은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깊은 관계를 만든다는 사실을
천천히 깨닫게 된다.

네 번째 변화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는 것이다.
케러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용서는 인간의 의지로만 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용서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여 주셔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영적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를 배우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더욱 분명히 보게 되고
그 한계 속에서 하나님을 더 깊게 찾게 된다.
용서의 여정은
기도와 성찰,
기다림과 의존,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훈련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오래 참으셨던 순간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아프게 했던 순간들이
천천히 떠오르고
그 자리에서 은혜가 다시 자란다.

다섯 번째 변화는
삶의 전체적인 정서가 부드러워진다는 것이다.
분노와 상처는 마음을 굳게 만든다.
판단적이 되고
쉽게 예민해지고
작은 말에도 상처 받고
표현은 날카로워진다.
하지만 용서를 배운 사람에게는
마음의 근육이 조금씩 풀리는 변화가 찾아온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완만해지고
다른 사람의 실수도 전처럼 치명적으로 보이지 않게 된다.
상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인정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부드러움이다.
이 부드러움이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관계를 건강하게 한다.

케러는 마지막으로
용서가 가져오는 변화 중 가장 중요한 것,
영적 자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상처가 나를 지배하지 않고
상대의 행동이 나의 평화를 빼앗지 않으며
과거의 사건이 지금의 행복을 훼손하지 못하는 상태.
이 자유야말로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깊은 선물이다.
용서는 이 자유로 가는 문이다.


책의 후반부로 들어가면 케러는
개인의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용서의 과정을 떠나
더 큰 규모의 문제, 즉 공동체와 사회에서의 용서를 다룬다.
이 부분은 단순히 개인적 감정 치유를 넘어
‘용서가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라는
더 넓은 질문과 맞닿아 있다.
케러는 이 주제를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접근한다.
왜냐하면 사회적·역사적 차원의 상처는
개인적 상처보다 훨씬 복잡하고,
용서라는 단어 하나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케러가 강조하는 첫 번째 원리는
개인적 용서와 공적 정의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이야기하면
정의가 무너진다고 생각한다.
잘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냥 ‘용서한다’는 말로 넘어가면
피해자는 또다시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의 맥락에서는
이 문제가 매우 민감하게 다가온다.
한국 사회는 여러 사건에서
“피해자가 용서를 강요받는 구조”를 반복해왔다.
가정폭력, 학교폭력, 종교 공동체 내 상처,
사회적 비극 등 많은 영역에서
피해자에게 “이해해야 한다”,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 쉽게 던져져 왔다.
그 말은 오히려 피해자의 고통을 더 크게 만들었다.

케러도 이 지점을 날카롭게 짚는다.
그는 말한다.
“용서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을 묻기 위해 필요한 내적 힘을 제공한다.”
이 말은 놀라울 만큼 균형 잡힌 시각이었다.
용서가 정의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힘과 분별력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정의를 실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구조는 다음과 같다.

  1. 개인적 차원에서 마음의 독을 제거하는 과정이 용서이다.
    감정적 분노를 덜어내고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과정이다.
  2. 공적 차원에서 책임을 묻는 것은 정의의 영역이다.
    이 영역은 공동체와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한다.
    법적 책임, 사회적 책임, 제도적 책임.
  3.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되어서는 안 된다.
    용서 없는 정의는 잔인해지고,
    정의 없는 용서는 왜곡된다.

이 구조는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상처를 사적으로 덮어버리는 방식,
가해자 편을 드는 방식,
피해자의 목소리를 약하게 만드는 방식은
어떤 신앙적 용서도 아니다.
오히려 케러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정직하게 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용서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케러는 이어서
함부로 용서를 요구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용서는 강요될 수 없는 일이며
강요되는 순간, 용서는 상처의 2차 가해가 된다.
용서는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그 과정은 느리고 개인적이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그 어떤 영적 권위자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는 말이라는 점을
그는 매우 신중하게 설명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한국 교회와 한국 공동체 문화 속에서
용서가 어떻게 잘못 사용되어 왔는지 떠올렸다.
용서는 성숙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식의 논리,
피해자의 감정을 억누르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용서를 요구하는 구조,
솔직한 분노 표현을 신앙 없음으로 규정하는 태도들.
이런 것들은 용서가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치유를 방해하는 영적 압박일 뿐이다.

케러는 단호하게 말한다.
용서는 피해자가 준비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 준비는 외부에서 판단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당사자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다.
따라서 공동체는 피해자의 감정을 존중하고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며
감정을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어야 한다.
이 태도가 없으면
용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케러는 또 하나 중요한 균형을 제시한다.
그는 화해(reconciliation)와 용서(forgiveness)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단어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과정이다.

  • 용서는 한쪽이 먼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풀어내는 과정이다.
  • 화해는 양쪽이 함께 회복을 시도할 때에만 가능하다.

즉, 용서는 혼자 할 수 있지만
화해는 혼자 할 수 없다.
이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면
피해자는 화해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용서를 못하고 있다’고 자책하게 되고
또 다시 상처를 받는다.

케러의 설명은 명확하다.
“용서는 한 사람의 영적 선택이다.
화해는 두 사람의 관계적 선택이다.”
따라서 용서가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안전과 건강을 위해
관계 회복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지혜로운 선택일 수 있다.
이 말을 읽으며 나는
용서의 결과를 한 가지로 규정하려고 했던
나의 사고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케러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상대방을 향한 마음의 빚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다.
화해는 다시 그 사람과 길을 함께 걷는 일이다.”

이 구분은 매우 실질적이다.
용서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화해를 시도하면
상처는 반복되고
또 다른 상처가 생긴다.
하지만 용서는
감정의 독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기 때문에
화해가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내 영혼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제 책의 가장 깊은 주제로 케러는 도달한다.
그는 용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용서는 인간의 심리나 윤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중심에서부터 흘러나오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은혜 안에서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모든 참된 용서는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이 말은 진부해 보일 수 있지만
책이 쌓아온 설명을 통과한 뒤에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면
전혀 다른 깊이로 다가온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극적인 용서의 표지였고,
하나님이 자신의 정의와 자비를
완벽하게 조화시킨 자리였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얼마나 값비싼 것이었는지를 다시 보게 되고
그 은혜가 있을 때에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용서라는 선물을
흘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십자가를 용서의 출발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용서라는 단어가 단순히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영적 현실이 된다.
케러는 이 사실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한다.
그는 십자가를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완성하신 실제 사건으로 바라본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죄에 대한 진지한 책임을 묻는 동시에
죄인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래서 십자가는 ‘정의를 포기한 자비’가 아니라
‘정의를 완성한 자비’였다.

이 균형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용서는 왜 가능한지,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설명되기 시작한다.

십자가는 “모든 죄가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말한다.
용서는 죄를 작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죄는 언제나 무겁고,
상처는 언제나 아프고,
잘못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한다.
하지만 동시에
십자가는 “죄보다 더 큰 자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용서를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

케러는 용서를 복음의 본질과 연결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나는 복음을 살아내고 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마음 한쪽이 조용히 멈추는 느낌이 있었다.
복음은 단순히 교리를 믿는 일이나
종교적 활동을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삶에서 다시 흘려보내는 과정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용서만큼 명확하게 보여주는 행동이 없다는 사실.
이 인식은 용서를 단순한 윤리적 행위에서
영적 순종의 행위로 바꾸어 놓았다.

이 대목에서 케러는
용서를 더 깊은 ‘신앙의 체질 변화’라고 말한다.
용서는 마음으로만 결심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오래된 감정 패턴들—
자기 방어, 분노, 상처에 대한 집착,
상대와의 비교, 자존심—
이 모든 것들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영적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조금씩 닮아간다.
이것이 케러가 말하는
“복음적 용서”의 핵심이다.

케러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구분을 다시 강조한다.
복음적 용서는
상대를 ‘그냥 잊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기억하는 것이다.
상대가 나에게 준 상처,
그 고통의 무게,
그로 인해 내가 잃어버린 것들.
이것을 정확히 기억할 때만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셨는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과정이 아니라
기억을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이다.

그는 말한다.
“용서는 나의 상처를 하나님이 다루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이다.”
이 문장은 용서의 깊은 본질을 정확하게 요약한다.
내 상처를 내가 붙들고 있으면
그 상처는 나를 계속 흔들고
삶의 중심을 차지하며
내 시선과 감정을 지배한다.
그러나 상처를 하나님께 맡기는 순간
그 상처는 하나님 안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상처가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그 상처가 나를 규정하는 힘은 약해진다.
이것이 용서의 신비이자
복음의 능력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케러는 용서가 삶에 어떤 결실을 맺는지
그리고 그 결실이 공동체의 관계까지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용서를 ‘개인적 은혜’로만 보지 않는다.
용서는 관계와 공동체 전체를
다시 건강하게 만드는
영적 생태계의 재정비이다.

그는 말한다.
“용서가 넘치는 공동체에서
사람들은 안전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용서는
실수를 허용하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하고
누구나 상처를 주고
누구나 관계에서 무너질 수 있다.
하지만 용서가 존재하는 공동체는
실수 이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한다.
이 두 번째 기회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된다.
용서 없는 공동체는
기대는 높고,
용납은 좁고,
관계는 쉽게 끊어지며
사람들은 마음을 숨기고 살아간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한국 교회와 한국의 공동체 문화가
용서를 어떻게 더 깊이 배워야 하는지를
오래도록 생각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는 빠르고, 효율적이고, 평가 중심적이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고
한 번의 잘못이 사람을 완전히 규정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런 구조 속에서
용서의 자리는 너무나 좁아지고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안전함보다는 판단을 먼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용서가 회복되는 순간
사람들은 관계 안에서 다시 숨을 쉬게 되고
상처가 안전하게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케러는 이 지점을
“복음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향기”라고 묘사한다.

케러는 마지막으로
용서가 결국 믿음의 성숙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용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께 자신의 감정과 상처를 맡기는 훈련을 통해
영적으로 더 단단해지고
더 부드러워진다.
이 부드러움은
상대의 잘못을 가볍게 여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영적인 유연함이다.


용서의 메시지가 아무리 귀해도
그 메시지가 ‘삶의 장면들’ 속에서 실제로 적용되지 않는다면
책은 단순한 감동으로만 남는다.
케러는 이 책을 통해
용서가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이 과정은 한국의 문화와 정서 안에서도
실제로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한국 사회는 관계의 밀도가 높다.
가족, 직장, 교회, 동료, 지인 관계가
서로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안에서 생겨나는 상처도 결코 가볍지 않다.
같은 집에 사는 가족에게서 받는 상처는
수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고,
직장에서 반복되는 무시나 냉대는
사람을 깊은 곳까지 흔들 수 있으며,
교회에서 겪는 상처는
영적 신뢰의 일부를 무너뜨린다.
인간관계가 빽빽한 문화에서
상처는 쉽게 쌓이고
해결되지 않은 감정은
일상의 여러 순간에서 얼굴을 드러낸다.

이렇기 때문에
용서의 과정은 한국인에게 더욱 필요하다.
그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감정을 마음속 깊은 곳에 보관하며 살아가고
그 감정은 어느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형태로
삶을 무겁게 누르기 시작한다.

책을 읽으며 가장 현실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용서가 “과거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현재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점이다.
용서는 과거를 지우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용서는
과거가 나의 현재를 지배하지 않게 만드는 능력이다.
내가 받은 상처가
오늘의 선택과 감정과 관계를 흔들지 않도록
그 영향력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다.
이 자유가 없으면
우리는 항상 과거에 머문 채
현재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관계는 자연스럽게 비틀리기 시작한다.

케러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실제적인 적용점들을 제시한다.
그 중 몇 가지는
한국인의 감정 구조와 관계 맥락에서
특히 효과적으로 느껴졌다.

첫 번째 적용점은
가족 안에서의 용서이다.
한국인에게 가족은 가장 가까운 존재이지만
가장 깊은 상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부부 사이에서
상처는 너무 쉽게 쌓인다.
기대가 크기 때문에
상처도 더 크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말하지 않기 때문에
상처가 더 오래 눌려 있는 경우가 많다.

용서는 이런 가족 관계에서
감정의 압박을 풀어주는 첫 걸음이 된다.
케러는 용서를
“상대의 문제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간성을 다시 보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가족 관계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가족은 종종 ‘역할’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부모는 부모 역할만,
자녀는 자녀 역할만.
그러나 역할 속에 있는 ‘한 사람’을 다시 볼 때
상처 너머의 진심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고
그 이해가 용서를 가능하게 한다.

두 번째 적용점은
직장 안에서의 용서이다.
한국의 직장 문화는 경쟁적이고
감정 표현이 제한적이며
서로의 상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분위기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무시, 불공평한 대우,
불합리한 결정 하나하나가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면
직장은 일하는 공간이 아니라
감정을 눌러두는 공간이 되고
삶 전체가 피로해진다.

케러가 말하는 용서의 원리는
직장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상대의 인간성을 다시 바라보고
내 감정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
이 과정은 직장에서
내 마음을 지키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용서 없는 직장에서
사람은 점점 굳어지고
일상은 점점 냉소적이 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적용점은
교회 안에서의 용서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영적으로 가장 따뜻해야 할 공간이지만
상처도 자주 생기는 곳이다.
기대가 높기 때문이고
영적 신뢰가 깊기 때문에
상처 또한 깊어진다.
누군가에게 무심하게 한 말,
목회자의 실수,
성도의 부족함이
마음속에서 오래 남아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만드는 경우도 많다.

케러는
“용서를 배우지 않는 공동체는
결국 서로를 지치게 만든다”고 말한다.
용서가 회복되면
교회는 더 안전한 공간이 되고
서로의 취약함을 받아줄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된다.
용서는 교회의 기능을 다시 만들고
흐트러진 관계를 다시 잇는
영적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네 번째 적용점은
내가 나를 용서하는 일이다.
이 부분은 케러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지만
한국인에게 특별히 필요한 메시지다.
한국인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존재다.
작은 실수도 크게 느끼고
스스로를 비난하며
자责의 고리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케러는 말한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사람을
자기 자신이 정죄할 이유는 없다.”

자기자비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나온다.
하나님이 나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존재’로 부르셨다면
나도 나를 그렇게 바라보아야 한다.
이 부분은 많은 한국인에게
정서적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적용점이었다.

다섯 번째 적용점은
오래된 상처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케러는 오래된 상처일수록
용서가 더디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상처가 하나님 안에서 조금씩 재해석되는 과정을
아주 실제적으로 설명한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지만
상처가 내 삶을 규정하는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과거를 바꾸지 못하더라도
과거가 내게 말하는 목소리는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바뀔 수 있다.

이 적용점들은 한국 독자의 삶 전체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한국 사회의 감정 구조,
관계의 밀도,
상처를 말하기 어려운 환경,
그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신앙 여정—all of this—
이 책의 메시지와 놀라울 만큼 잘 맞아떨어진다.


용서라는 주제를 오래 붙들고 글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줘야 하는 일’이라는 의무의 느낌보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해오셨는지 이해하는 일’로
더 깊게 자리 잡기 시작한다.
책이 후반부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전환도 바로 이것이다.
용서는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를
삶에서 서서히 다시 흘려보내는 과정이라는 것.

케러는 이 부분에서
용서를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 말이 처음엔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졌지만
텍스트가 쌓여 가면서
그 의미가 아주 구체적인 감각으로 다가왔다.
하나님이 내게 오래 참으신 순간들,
내가 깨닫지도 못한 채 넘어갔던 죄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지 않으셨던 순간들이
천천히 한 장면씩 떠올랐다.

그 기억들이 쌓이자
용서가 갑자기 다른 차원에서 읽히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나는 단순히 하나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 전체가 받아온 은혜의 방식,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신 방식,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자비의 무게를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를 배우는 일은
사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에 관한 질문이 되었다.

케러는 이 부분에서
용서의 여정을 “부드러워지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이 부드러움은 성격 온화함 같은 외적 성향이 아니다.
지나온 상처로 마음이 굳어 있던 사람이
그 굳은 부분이 조금씩 녹는 과정을 말한다.
삶에 대한 태도가 느슨해지고
사람을 향한 시선이 둥글어지고
말의 무게와 감정의 깊이가 달라진다.
용서는 결국 우리를
좀 더 인간답게 만들고
좀 더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방식으로
세계와 사람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오래전 겪었던 한 상처를 떠올렸다.
그 사건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어떤 감정적 찌꺼기처럼
가끔 마음 깊은 곳에서 불쑥 올라오곤 했다.
나는 그것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은 해결책이 아니라
증상이 묻히게 만드는 장치일 뿐이었다.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어떤 자극이 올 때마다
조용히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때 케러의 한 문장이
마음의 깊은 부분에 파고들었다.
“상처는 시간이 아니라 은혜로 치유된다.”
이 말이 너무 분명해서
잠시 책을 덮고 혼자 조용히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상처를 덮어 두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 상처를 하나님께 드린 적도 없었고
그 상처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정직하게 말해본 적도 없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용서는 단순히 선한 행동이 아니라
치유의 방식이라는 것을.
상처를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과정이며
내가 붙들고 있는 과거의 무게를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일이었다.

케러가 소개하는 용서의 단계 중
가장 은혜롭게 다가온 표현은
“하나님께 복수권을 양도하는 일”이다.
이 표현은 굉장히 신학적이면서도
놀랍도록 인간적인 감정을 건드린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누군가에게 상처받았을 때
그 사람이 나와 동일한 고통을 느끼기를 바라는
아주 원초적인 본능이 있다.
이것이 죄성 때문이라고만 말하면
너무 얄팍한 설명이 된다.
그 감정은 상처받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하지만 그 본능이
잘못된 방식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고통의 순환 구조 안에 가두게 된다.

하나님께 복수권을 맡긴다는 것은
내가 스스로 정의를 완성하려는 욕구를 내려놓고
하나님이 더 크고 더 정확한 방식으로
모든 것을 다루실 것이라는 믿음을 선택하는 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내가 더 이상
상대의 행동이나 태도에
나의 내면을 묶어두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자유는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평안이다.

용서는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용서를 배우는 사람은
관계 속에서 새로운 유형의 힘을 갖게 된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힘이 아니라
상대가 변화할 수 있도록 기다릴 수 있는 힘.
상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함을 제공하는 힘.
이 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방식과 닮아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셔서 변화시키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에게 안전함을 주시고
그 안전함 속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고 변화할 수 있도록 기다리셨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많은 인간관계 문제가
“진실한 안전함의 부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자리에서만
정직해질 수 있고
정직함이 회복의 출발이다.
용서를 배운 사람은
이 안전함을 제공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안전함은
누군가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방식을 닮아 있다.

책의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케러의 문장들은 더 부드러워지고
더 조용해지며
더 깊이 내려간다.
용서라는 주제가
처음에는 감정의 영역처럼 보였지만
마지막에는 신앙의 중심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내려앉는다.
그 내려앉음이 마음에서 울림을 만든다.
독자는 책을 다 읽고 난 뒤
누군가를 당장 용서할 수 있게 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내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알게 된다.

케러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 여정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길’이라고 말한다.
용서는 결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걸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을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타인을 향한 마음도
조금씩 더 부드러워진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용서가 얼마나 깊은 주제인지
얼마나 인간적인지
얼마나 영혼 전체를 흔드는지
다시 새롭게 배웠기 때문이다.
케러는 우리의 내면에
무리하게 어떤 결단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아주 작은 방향 전환부터 시작하라고 말한다.
과거에 묶여 있던 자리에서
하나님을 향한 작은 회전 하나.
그 작은 회전이
용서의 여정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오늘 내가 가진 상처를
어설픈 긍정이나 억지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조용히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용서를
조금씩 배워가게 되고,
그 배움은 결국
사람을 더 따뜻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이 주는 마지막 여운이었다.
설교나 교리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찾아오는
조용한 변화.
그 변화가
내가 누군가에게 용서를 말하고 싶어지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않게 해주는 변화였다.

그리고 그 은혜가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가는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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