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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이 나를 묶어둘 때, 은혜는 어떻게 사람을 다시 걷게 하는가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는 오래전부터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그냥 단순히 어떠한 감정이라고 딱 정의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모욕감에 대해 느끼는 분노?..

슬픔?…창피함?..부끄러움?…

뭐라 딱 명확한 말로 표현하기 좀 많이 어려운 감정인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사람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내가 왜 이렇게 작아지는지 모르겠는 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 나를 크게 비난한 것도 아닌데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어려움..

이런 부정적 감정들이 내 안을 조용히 잠식할 때가 있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명확하게 이름 붙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수치심이었다.

저자는 수치심을
어떠한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무너뜨리는 내면의 구조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치심은
“내가 잘못 행동했다”가 아니라
“나는 본질적으로 결함 있는 존재다”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게 만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무섭다.
행동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성 자체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생각이 스쳐들자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게 되었다.

그 이유는..
나의 평생을 옭아매고 붙잡고 있었던
어떤 어두운 감정 하나가
정확히 저 구조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수치심의 기원을
비난하거나 고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치심이 어디서 오는지를
아주 부드럽고 성찰적인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

대부분의 수치심은
누군가의 말 한마디,
가족 안에서 들었던 반복된 표현,
너무 어린 시절에 받았던 부정적 평가,
혹은 자신의 실수와 실패에 대한 과도한 자기비난을 통해
천천히 만들어지고 형성 되어진다.

그러한 부정적 감정 덩어리는 그렇게 천천히 오래 쌓여 가며
그렇게 사람을 조용히 지배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말한다.

“수치심은 조용히 사람을 고립시킨다.” 라고 말이다..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어떤 오래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 속에 있는데도
이상하게 고독했던 순간들..
다 괜찮아 보이는데
유독 나만 어딘가 어긋난 사람처럼 느껴졌던 날들…

그게 바로 수치심이 만들어낸 고립이었던 것 같다

….

이 책은 수치심을
단순히 분석하고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은혜가 이러한 수치심을 어떻게 녹이는가였다.

저자는 은혜를
“결함을 가리는 힘 또는 어떠한 수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결함이 있는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 오신다는 선언”이라고 말한다.

이 관점은
수치심 치유에서의 핵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수치심은
본능적으로 결함을 덮어 버리고 숨기고 싶어 한다.
가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혜는
그 가리려는 마음을
부드럽게 내려놓게 만든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랫동안 붙잡혀 있던 어떤 감정이
조금 느슨해지는 걸 느끼게 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수치심은 어둠에서 자라고, 은혜는 드러남에서 자란다

우리는 수치심 자체를 대면하는 것 조차 두렵고 자신이 없어
내 안의 상처를 숨기기 급급해하지만,
실은 그러한 숨기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상처는 한없이 더 깊어지고 만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나의 연약함을 내어줄 때,
나의 있는 그대로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마주할 때,
은혜는 그 자리에서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런 하나 하나의 경험이
사람의 삶을 조용히 바꾸어가는게 아닌가 싶다

나는 이 책의 문장들을 읽으며
내가 살면서 가장 회복을 경험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은
누군가가 내 상처를 고쳐준 순간이 아니었다.
정답을 말해준 순간도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가
“그럴 수 있어”
“너 잘못 아니야”
“괜찮아” 라고 말해줬던 어떤 날..어떤 순간들이었다

이런 말 한 마디.. 한 마디들이
견고한 틀로 내 마음을 자리 잡은 수치심을 조금씩 흔들어 놓았었다.

그때 나는 몰랐었지만
그러한 순간들이 바로 은혜의 작은 문 틈이 조금씩 열리고 있던 순간이었던 것 같다.

저자는 수치심이 가장 먼저 무너뜨리는 자리가 관계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는데
내 안에서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 하나가
툭 하고 올라왔다.

왜냐하면..정말 그랬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 앞에서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어떤 자리는 괜히 피하고 싶었고,
누군가가 나를 보는 시선이
괜히 불편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게 단순히 그냥 나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수치심이 만든 ‘보이지 않는 경계선’ 때문이었다는 것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치심은 사람을 숨게 만들고,
은혜는 사람을 다시 연결시킨다.”
라고..

이 문장의 글귀가 내 마음속에서 오래 머물렀다.

수치심은
사람과의 거리를 넓히고
내 존재를 작게 만들고
관계를 ‘불편’하고 마치 ‘위협’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의 관심조차
나를 평가하려는 시도로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웃음이 마치 나를 비웃는 것은 아닌가?’ 라는
비뚤어진 생각도 하게 만들어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더 두려워하고
그런 것들이 하나 하나 쌓여 나를 더욱더 위축되고 움츠려들게 만들었었다

사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드러날 ‘부족한 내 자신’,
그들이 이런 연약하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내 자신을 알게 되면
그들이 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나를 버리고 떠나 버릴까봐…
사실.. 나는 그런것들이 두려웠던 것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부족한 내 자신이 드러날까봐”

저자는 이런 순간을
아주 정확하게 짚어낸다.

“수치심은 ‘내 자신 자체가 결함이다’라는 거짓을 반복 학습시킨다.”라고…

그 거짓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특별히 더 강력하게 작용
한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도
그걸 믿을 수 없고,
누군가 내 편을 들어줘도
그 마음이 오래 가지 않을 것 같고,
상대가 조금만 차갑게 대해도
“역시 나는 문제가 있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관계는 그대로인데
관계를 해석하는 내 마음이
왜곡된 것
이었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아주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다.

“수치심의 반대말은 자존감이 아니라 은혜다.”라고

….

일반적인 심리학에서는
수치심을 없애기 위해
자존감을 세우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자존감으로는 수치심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자존감은
‘내가 괜찮다’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지만,

수치심은
‘나는 본질적으로 flawed(결함 있다)’라는
존재의 영역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의 상처는
존재를 향한 은혜만이 치유할 수 있다
는..
이 설명이 정말 마음 깊게 와 닿았다..

책에서 저자의 치유에 대한 서사는
굉장히 섬세하다.

저자는 치유의 시작을
‘솔직한 자기 노출’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 자기 노출은
무조건 털어놓는 고백이 아니다.

내가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는 환경에서,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관계에서,
‘이 사람은 나를 판단하지 않겠다’라고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걸 저자는
“은혜의 공간(safe space)”이라고 부른다.

책은 치유의 과정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자기 마음의 노출 → 자신을 용납하는 경험 → 마음의 이완 → 정체성 재구성”

이 네 단계가
수치심의 구조를 부드럽게 해체한다.

그리고 이 과정 어디에서든
하나님은 ‘비난자 또는 심판자가 아니라 동행자’로 함께 계신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증거로 삼지 않으신다.
그 상처가 은혜로 다시 쓰일 날을 기다리실 뿐이다.”

버티기 힘들고 버거워 도망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들..
다시 들쳐 보고 싶지도 않고 들쳐 볼 자신조차 없는 내 삶의 실패한 이야기들..
차마 꺼내기도 부끄러운 지난날의 비겁했던 내 자신의 연약한 모습들…
남들에게 상처 주고 실망시켰던 수많은 나의 형편 없는 모습들..
오래 마음에 남아 있는 수많은 실수들과 자책의 순간들…

그 모든 것들이
사실 내 자신을 책망하거나 자책할만한 부끄러움의 증거들이 아니라
언젠가 누군가를 위로해 주고 공감해 줄 수 있는
그리고 다시 격려해 주고 누군가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줄 수 있는
은혜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이 말이..
내게 오래도록 그리고 깊게 자리잡은 수치심의 그림자를 천천히 걷어내는 힘이 되었다.

…..

책은 어느 지점에서
수치심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내면의 해방’이라고 표현한다.

이 해방은
어떤 외부 조건이 바뀌어서 오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큰 자신감이 생겨서 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더 이상 숨지 않아도 된다”
라는 아주 조용한 감각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마음이 조금 먹먹해졌다..

그 이유는
수치심을 오래 품고 사는 사람은
평생 자신을..자신의 감정을 숨기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숨는 게 습관이 되고,
습관이 정체성이 되고,
정체성이 결국
“나는 원래 이런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이렇게 부족한 사람..
원래 이렇게 안 되는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할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누구에게도 인정 받지 못할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를 실망시킬 수 밖에 없는 사람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져버리고 또 져버릴 죄인 ”이라는
스스로를 향해 이런 부정적이고 단단한 문장으로 굳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치심은 자기 부정으로 굳어지고,
은혜는 자기 수용으로 흘러간다.”
라고..

이 문장은
나의 오래 굳어져버린 패턴을 조용히 건드렸다.

내가 누군가에게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마음이 움츠러들던 이유.
누군가의 칭찬조차
의심스럽게 들리던 이유.

그 모든 것 뒤에는
나의 이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은혜는 정답이 아니라,
내 자신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시선이다.”
라고 말이다

우리는 보통
문제가 해결되어야 해방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뭔가 달라져야 자유가 올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책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한다.

사람을 묶고 있던 기준이
조금 느슨해지는 시점,
관계를 왜곡해 보던 시선이 좀 더 풀어지고 바르게 전환되는 시점,
스스로를 향한 미움 시선이 좀 더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으로 전환되는 시점…

그때 오는 작은 평온이
해방의 시작이라고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얼마나 많은 위로가 담겨 있는지
읽는 동안 천천히 느껴졌다.

사람은 완전히 달라지기 전까지
자신이 변화했다고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은혜는 사람을 ‘조금씩’ 바꾼다.

조금 덜 긴장하게 만들고
조금 덜 숨게 만들고
조금 덜 자신을 미워하게 만드는 것

이러한 작은 ‘조금’의 변화가
사람의 인생을 더 깊은 곳에서부터 바꿔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책의 후반부에는
치유의 한 순간을 묘사한 장면이 있다.

상담을 받던 한 사람이
오랫동안 숨기고 있던 아픔을
처음으로 말하는 순간.

말이 끝나고
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상담자는
그를 판단하지도, 당혹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눈을 맞추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나에게 이야기를 들러 줄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이 한 문장이
그 사람의 마음을 오랫동안 지배해 왔던
수치심의 벽을 부드럽게 흔드는 장면이라고 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내 상처를 듣고도
나를 떠나지 않는 순간,
그 자리에 은혜가 있다.”
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그동안 내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음을 떠올렸다.

그 사람들은
나의 뭔가를 고치려 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내가 부끄러워하던 부분을 부담스럽게
무겁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그걸 말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을
내가 부담 느끼지 않게 받아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내가 은혜를 입은 순간이었다..



책은 수치심 치유를
심리 상담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신앙과의 연결을
굉장히 절제된 언어로 풀어낸다.

특히 이 문장이 내 마음에 깊이 남았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상처가 우리의 이름이 되도록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 말이.. 이 문장의 글귀가 한 글자 한 글자가
나의 마음을 따스하게 안아 주는게 느껴졌다.

내가 실패했던 날,
내가 도망치고 싶던 순간
내가 내 자신을 자책하게 만드는 순간
내가 부끄러워서 숨고 싶었던 기억들…

이런 나를 힘들게 하고 버겁게 하고
내 자신을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었던 것들 사이사이로
은혜가 스며 들어가는 감이 느껴졌다

….

나는 이 대목에서
오래 숨겨두었던 감정 하나를 떠올렸다.

나는 어려서 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자신 스스로게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난 왜 항상 이럴까?…”
“난 안 되는걸까?…”

어떠한 실패의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내 자신에게 또는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고 생각 들 때
이러한 내 자신을 향한 말은
수치심의 씨앗처럼 한 알 한 알 내 마음 깊숙이 심겨지게 되었었다.

그리고 이 말은
마치 내 자신을 정의하는 하나의 내 이름처럼 들렸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따위 말이 나를 규정할 수는 없다.”

내가 누군인지
이런 말들이 결정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느껴졌다.

사실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는지가
나의 진짜 정체성이었다.

..


책은 마지막 부분에서
은혜를 이렇게 설명한다.

“은혜는 실패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실패가 나를 집어 삼키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이다.”

이 말은 내 오래된 기억을 풀어내는 열쇠처럼 느껴졌다.

수치심은 사람을 묶어두고
은혜는 사람을 다시 걷게 한다.

수치심은 나를 작게 만들고
은혜는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나는 지금도
완전히 회복된 사람이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이 ‘조금’이
생각보다 크다.

책은 후반부에서
‘은혜가 실제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아주 현실적인 언어로 설명한다.

이 부분이
가장 따뜻하면서도
가장 실제적이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수치심이 약해지는 순간은
항상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혼자 싸우면
수치심이 오히려 더 자라난다.
그 이유는 혼자 있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장 잔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의 연약함을 듣고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대로 나를 바라봐 준다면,

그 순간 수치심은 힘을 잃는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여러 장면들이 스쳐 갔다.

내가 아무리 떨쳐 내려고 해도 잊혀지지 않는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내 자신을 한없이 자책하게 만들고
내 자신 스스로를 한없이 작게 만드는 수많은 순간들

사실 그 순간들 속에
“그때 너도 참 힘들었겠다.”
“너 홀로 많이 버겁고 무섭고 힘들었겠다”
“그럴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 라는 식의 말들을 듣고 싶었던 대상은
사실 어떤 다른 이들이 아닌
어쩌면 내 자신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매번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벽 앞에 무너지는 내 자신을 보며..
매번 이겨내고 싶은 순간들 속에 이겨내지 못하고 용기 없이 비겁하게 도망치려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잘 해내고 싶은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 형편 없는 모습을 보였던 내 자신을 보며…
나는 내 자신 스스로를 원망했고 비난했고 용서할 수 없었다

사실 내 마음 속 깊이 아주 아주 오랫동안 내 자신에게 해 주고 싶었고 또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너 그때 참.. 많이 힘들었겠다..
너 홀로 감당하려니 많이 무섭고 쓸쓸하고 외로웠겠다..”
“결과가 어떻든 넌 그 때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그것으로 충분해. 고생했다.. “
“아무리 애를 써도 뜻대로 안 되는 건 네 잘 못이 아니야.. 그럴 수도 있는 일이고 괜찮아..”
내가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뜻하게 포용해 주는 말들을 듣고 싶었고
내 자신 스스로에게 용서 받고 싶었고 용서 해 주고도 싶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내 자신을 토닥여 주고 싶기도..또 포옹 받고도 싶었다…

이런 내 자신의 마음들을 직접 대면하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내 자신 스스로를 옭아매고 괴롭히던 수치심이라는 감정의 감옥의 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수치심 속에 감춰 놓았던 내 자신을 드러내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런 내 마음을 토로해 내기 시작했다

수치심이라는 그늘 아래 묻어 놓았던 수많은 여러가지 감정들..
당시의 내가 느꼈던 고통과 슬픔.. 자책감.. 원망.. 후회.. 부끄러움.. 괴로움 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과 함께 쏟아내고 또 쏟아냈다
피를 토하듯 내 마음의 감정들을 토로하기 시작했고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렇게…
내 수치심을 대면하며 드러내기 시작한 자리에
뭔가 따스한 것이 채워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내 부족함이나 실수나 잘못이 사라진 게 아니라
하루하루 삶의 한 순간 한 순간들을
당시의 최선을 다해 버티고 살아 내었던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지 않고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그 느낌이..
내 자신을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내쉬며 살아갈 마음의 위로와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있었다

수치심은 삭제 버튼 누르듯 완전 삭제 되지도 사라지지 않아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내 자신을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 나를 향한 시선이 바뀌고 내 마음을 직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다시 숨을 내쉬고 들이 마실 수 있게 해 주었다

..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수치심은 ‘너는 뭔가 문제가 있다. 너는 뭔가 잘못됐다’는 목소리이고,
은혜는 ‘너는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라는 목소리이다.”
라고…

나는 이 대조적 표현의 글 귀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마음에 남았다.

우리는 평생
첫 번째 목소리에 익숙하게 살아온다.
실수하면 내 자신을 탓하고,
기대에 못 미치면 내 자신을 미워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받으면
‘내가 문제다’라고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은혜는
그 결론을 바꾼다.

“네가 잘못한 것일 수도 있고 잘 못 한 것이 사실일 수도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잘 못 할 수 있고 계속 실수도 할 수 있어.
그렇지만 그렇다고 너라는 사람 자체가 잘못된 존재는 아니야.”

라고……..
….

“은혜는 사람을 크게 바꾸지 않고,
사람을 깊게 바꾼다.”

책 내용 중에 나는 이 글귀가 마음이 깊게 다가왔다.

우리는 변화를 말하거나 변화의 결과를 기대할 때
보통 ‘극적인 변화’,
‘하루아침에 모든게 바뀌는 엄청난 드라마틱한 변화’ 를
떠올리고 또 기대한다

신앙이 깊어지면
모든 고민이 사라지고,
엉켰던 관계도 바로 회복되고,
약했던 마음도 하루아침에 견고하게 단단하게 변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현실의 치유는 그렇게 오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치유 되는 모습은
하루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지고,
내 실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느슨해지고,
나를 향한 미움의 강도가 약해지거나
나를 향한 시선의 관점이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이 ‘조금씩’의 변화들이 쌓이고 쌓이면
사람은 어느 날
확연히 달라져 있는 자신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될 수 있다

..

어느 날은 책의 예시 하나가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그건 한 여성의 이야기였는데

그녀는 평생
“넌 왜 항상 이것 밖에 못하니,
넌 겨우 이 정도인 사람인 거니,
넌 많이 부족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칭찬하면
그 말이 기쁘지 않고
불편하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상담 중에
아주 조용한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자
상담자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라는.. 그 한 문장.

설명도 길지 않고
이론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랫동안 조여 있던 무언가가
조금 풀리는 걸 느꼈다고 한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은 때로 한 문장으로 살아난다.”라고..

나는 이 말이 너무 좋았다.
내 인생도 결국
한 문장들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책의 후반부는
‘정체성의 재구성’을 다룬다.

수치심의 구조 안에서
사람은 늘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남들보다 못하다.”
“나는 실패한 존재다.”

하지만 은혜 속에서
사람은 이렇게 바뀐다
.

“나는 부족하지만 사랑받는 존재다.”

“나는 연약하지만 버림받지 않는다.”

“나는 실패하지만 내가 실패 그 자체는 아니다.”

정체성이 바뀌면
행동도 바뀌게 된다.

사람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대로
살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의 전반적인 메시지를 곰곰이 돌이켜 보면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수치심의 세계는 나를 어둠 가운데 가두지만,
은혜의 세계는 나를 다시 일어나 걷게 만든다.”
고..

나는 이 문장을 한참 마음에 담아두고 그 문장 자체를 느끼고 또 느껴 보았다

지금의 나는 여전히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수도 있다
여전히 어떤 날은
마음이 움츠러들고,
사람 앞에 설 때
괜히 작아질 때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 가운데 함께 있을 때
수치심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닐지라도
더 이상 어두운 이면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내 자신을 학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수시로 구원의 손길을 뻗어주고 안아 줄 것을 믿는다

그게 바로 은혜였다.
내가 자격이 있어 누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내 기준에 맞춰 내 자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존재성의 가치는 나를 창조하시고 죽기까지 나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정의 되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동안 수치심은
자꾸 나를 어떤 사건의 중심에 놓았다.
모든 사건을
“내가 잘못했다, 나는 부족하다”로 해석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은혜는
사람을 하나님 쪽으로 돌려놓는다.

“내가 실패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

이 관점의 차이가
사람의 감정 구조 전체를 바꾼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고,
사람을 대하는 말투가 달라지고,
실수했을 때 자신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진다.

이 변화는
작게 느껴지지만
인생 전체에 흐르는 결은 완전히 달라진다.

저자는 이 변화를
‘은혜의 방향성’이라고 불렀다.

나는 이 표현이 참 좋았다.
내 삶에 지금 필요한 것은
완전한 변화가 아니라
나를 대하는 올바른 방향성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결론부는
아주 잔잔한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수치심은 나를 뒤로 잡아당기지만,
은혜는 나를 앞으로 살포시 걸어가게 한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책 속에 나온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용기가 생겼다.

변화는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하루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상처가 다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

은혜는 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계속 걷게 만드는 힘이고
완벽하지 않고 버거울 수 있는 삶의 하루이지만
그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살아내게 만들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어느 날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큰 깨달음 때문이 아니라
너무 조용한 변화가
내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수치심을 없애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 감정이 내 삶을 방해하고
관계를 망치고
내 마음을 계속 작게 만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는데

저자는
수치심을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은혜로 덮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건 전혀 다른 길이었다.

책을 읽으며
나는 수치심을 없애기 위해
평생 나를 다그치며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왜 이 정도도 못 참지.’
‘왜 이렇게 마음이 약하지.’
‘왜 이런 모습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이런 말들은 계속해서 나를 더 움츠려들게 만들게 했고 숨게 만들었다.

하지만 은혜는
그러한 말들을 바꿔 주셨다.

“너는 약해도 괜찮다.”
“너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너를 실패자로 여기시지 않는다.”

내 마음을 향해 들려 주는 이러한 말들은
수치심이 움켜쥐고 있던 마음의 매듭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나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만
이제는 그 불완전함이
예전처럼 무섭지 않다.

왜냐하면
그 불완전함이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은혜가 필요한지를 어디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조용히 알려주는 표식이 되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지금의 나를
이전보다 훨씬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은
엄청나게 뭔가 큰 변화를 이끌어주는 책이 아니다.
대신에…
조용히 내 마음 가운데 스며드는 책이고,
그늘진 내 마음의 내면을 조금 더 밝혀 주고
그늘진 내 마음을 대면할 수 있게 용기를 주고
그늘진 내 마음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어 준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 느꼈다.

“나는 늘 부족하고 결핍이 있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난 늘 그것만으로 충분한 사람이다.”
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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